(21)천혜의 경관과 시간의 흐름에 가려진 ‘시대의 아픔’
(21)천혜의 경관과 시간의 흐름에 가려진 ‘시대의 아픔’
  • 박형준 기자
  • 승인 2018.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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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대 습격에 중문 초토화…상문동 흔적 없이 사라져
유족들, 희생자 기리는 위령비 세워…787인 명단 새겨
4·3 당시 중문지역 희생자 학살터 중 한 곳인 천제연폭포.
4·3 당시 중문지역 희생자 학살터 중 한 곳인 천제연폭포.

제주 3대 폭포인 천제연 폭포를 비롯해 그 일대의 중문관광단지는 제주 제일의 관광지로 널리 이름을 알리며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명소가 됐다.

하지만 이 지역은 제주 4·3 당시 수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한 학살터로 천혜의 화려한 경관과 시간의 흐름에 의해 가려진 시대의 아픔이 남아있는 곳이다.

중문면에서 주민들이 10명 이상 집단으로 희생된 장소는 5곳으로 대습이우영, 중문초등학교 동쪽 밭인 버리왓’, ‘자운당 골짜기’, 현 중문천주교회 자리인 신사터’, 당시 소와 돼지를 잡던 도살장이었던 천제연 폭포 입구 소나무밭등이다. 이곳에서 중문면과 인근 마을 사람들이 무참하게 집단 학살 당했다.

중문지역에서 발생한 최초의 집단학살은 무장대의 중문면사무소 및 식량창고 습격이 일어난 다음 날인 115일 발생했다.

당시 경찰이 무장대의 가족들을 불탄 면사무소 뜰에 잡아온 후 마을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시켰다.

당시 희생자에는 마을 이장도 포함돼 있었는데, 마침 집안 제사가 있었기 때문에 학살장면을 보지 않기 위해 피했다가 무장대 관계자로 몰려 희생된 것이다.

무장대의 습격사건이 벌어진 며칠 후인 1117일에는 정부가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이후 중문지역은 밤에는 무장대 습격으로 인한 피해를, 낮에는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에 의한 고초를 겪게 된다.

당시 중문지역은 다행히 대부분의 부락이 해안가에 위치해 있어 중산간지대 적성지역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20여 호가 거주하던 상문동이 단지 고지에 위치해 있었다는 이유로 소개되면서 현재는 마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중문면의 집단 희생터 중 하나인 천제연폭포 입구 소나무밭은 당시 소와 돼지를 잡던 도살장으로, 이곳에서는 중문리 주민들은 희생되지 않았지만 인근 마을 상예리 주민 7, 하예리 주민 13, 색달리 주민 3, 대포리 주민 5, 하원리 주민 1, 월평리 주민 8, 회수리 주민 3명 등 총 40명이 희생됐다.

이들 희생자들은 무장대 관계자로 오인돼 조사 명목으로 연행됐거나 명령에 따라 중문지서에 출두했다가 총살을 당하거나 도피생활 중 발각돼 희생된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외에도 현재 중문천주교회가 위치한 신사터에서는 중학생들에게 죽창을 쥐어주고 이른바 사상불순자들을 찌르게 하는 등 차마 눈으로 보기 어려운 학살이 자행됐다.

중문 희생자 유족들이 2008년 설립한 4·3 희생자 위령비의 모습.
중문 희생자 유족들이 2008년 설립한 4·3 희생자 위령비의 모습.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중문지역 희생자들을 기리고 그 넋을 달래기 위해 중문 희생자 유족들은 2008년 봄 천제연 폭포 입구에 제주4·3 중문면 희생자 위령비를 세웠다. 위령비에는 제주4·3 중문면희생자위령비(濟州四·三 中文面犧牲者慰靈碑)’라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4·3희생자 760명과 피해자 27명의 명단이 새겨졌다.

현재 천제연폭포 제1폭포와 제1폭포를 연결하는 광장에 위치해 있는 해당 위령비 앞에는 제주4·3에 대한 내용을 한국어는 물론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 등으로 해설하고 있는 비석을 함께 세워놓아 관광객들에게 제주4·3을 알리는 역할도 하고 있다.

4·3유족 이치근씨
4·3유족 이치근씨

우리 떠나면 4·3 잊혀질까 걱정전승·교육 이뤄져야

지금 4·3에 대한 전승과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이렇게 세월만 흐르다 4·3의 실질적 경험자이자 목격자인 우리들이 죽고 나면 4·3이 서서히 잊혀지는 것은 아닌가 두렵다.”

평생을 중문에서 거주하며 이 지역에서 발생한 학살을 처음부터 목격했다는 이치근씨(89·사진).

그 역시 4·3 당시 친형이 희생된 4·3유족 중 한 사람이다.

이씨는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에 대해 처음 입을 열었다. “당시 내가 중학교 2학년일 때인데 194731일 당시 면사무소에서 3·1절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후에 연좌데모가 벌어졌다. 당시 어렸기 때문에 정확하게 무슨 행사인지 모르고 그냥 따라갔는데 경찰서에서 이를 해산시키기 위해 발포를 했고, 그 총탄에 내 친구가 맞아서 죽어버렸다. 이후에는 무슨 관계자들을 잡겠다고 사람들을 마구 잡아가는데 주민들이 견딜 수 있겠느냐. 이런 것들이 반감을 사고 결국 4·3이 발생한 것 아니겠느냐.”

연좌데모 발포사건 이후 1년이 지난 후 중문지역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이 발생하면서 중문면사무소와 식량창고, 중문중학원 등이 불에 탔다. 이후 정부의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됐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이씨는 사람의 목숨이 파리목숨만도 못했다. 내 친구들은 물론 친형과 친척 등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봤다특히 내 친구 중 한 명은 무장대 습격 당시 억지로 끌려갔는데 나중에 경찰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 내가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고 한숨을 쉬었다. 이어 또 우리 친형은 당시 민족청년단이라는 우익단체에서 활동을 했는데 다른 우익단체에 있던 가장 친한 친구가 모함을 해서 군에 끌려갔고 결국은 목숨까지 잃었다시대상황 자체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혼란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나마 지금에 와서는 제주4·3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지고, 진상이 규명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서 특히 군사재판에 대한 재심을 받는 분들을 TV에서 보고, 당시 끌려가면 무조건 죽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살아남아 재심을 받는 것 자체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씨는 지금 이 상황에서 그치지 말고 제대로 된 진실조사와 이에 대한 전승 및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젊은 사람들 중 4·3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나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경험자들인데 이제 나도 90이고 곧 갈 사람 아니겠느냐이런 무서운 일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남아있는 분들로부터 꼼꼼히 진술 받고 이 기록을 보전,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 알리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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