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범 김구 경호실장…조국 광복 위해 비밀공작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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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서 항일 활동
제주 출신 독립운동가 중 ‘유일’
유림·계림 전투 일본군 섬멸 공적
공작원 훈련 후 국내 파견됐으나
체포돼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
1945년 중국 충칭에 망명해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로 귀국하자 열린 귀국환영 전국대회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1945년 중국 충칭에 망명해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로 귀국하자 열린 귀국환영 전국대회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19193·1운동을 계기로 민족 해방과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의지를 하나로 결집해 항일 운동을 수행해 나갈 정부수립 계획이 국내·외서 진행됐다.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같은 해 413일 수립, 이념과 지역으로 나뉜 독립운동 역량을 하나로 집중시켰다.

문덕홍(文德洪, 1902~1949) 지사는 제주 출신 독립운동가 가운데 유일하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인물이다.

제주도 한림읍 옹포리 출신인 문 지사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일본 선박의 선원으로 강제 징용돼 상하이와 홍콩 등지에서 일을 하게 된다.

문 지사는 1940년 선박이 상하이로 입항한 기회를 이용해 탈출에 성공했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하고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한다.

문 지사는 같은 해 9월 중국 광시성 유림과 계림 전투에 참가해 일본군을 1개 여단을 무찌르는 공적을 세워 부대장으로 승진했다.

문 지사는 19412월 개봉에 침투해 3개월간 비밀 지하공작을 수행, 일본군 통역관을 포섭하기도 했다. 194210월 충칭에서 임시정부 경비대원에 임명됐다.

1943102일에는 임시의정원 전라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김구 선생이 주도하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한 후 1944년 임시정부 재무부 총무과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같은 해 6월 서무국 업무를 함께 맡기도 했다.

 

1945년 비밀공작을 위해 국내로 떠나기 전 김구 선생과 문덕홍 지사가 찍은 기념사진.
1945년 비밀공작을 위해 국내로 떠나기 전 김구 선생과 문덕홍 지사가 찍은 기념사진.

문 지사는 1945년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선생의 경호실장으로 임명됐다.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는 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켜 비밀공작을 진행하기 위해 김구 선생이 직접 주관하는 국내공작위원회를 설치, 운영했다.

국내공작위원회는 약산 김원봉을 비롯해 당시 국무위원들로 구성되는 등 임시정부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은 기구였다.

비밀 공작원 양성은 미군OSS(미국 육군전략처)에 의뢰했다.

문 지사는 일신의 안위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희생을 결심하고 비밀 공작원 훈련을 받는다.

1945년 임시정부는 비밀공작을 위해 국내로 문 지사를 파견한다.

임시정부를 떠나기 직전 문 지사는 김구 선생과 함께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김구 선생은 결사대에 보낼 징표로 사진에 친필로 임별(臨別) 민국(民國) 192759일 중경(重慶)에서라고 써서 주었다.

이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연합군이 제주도로 진공, 해방시키면 임시정부도 제주도로 들어와 국민을 지휘해 해방 작전을 펼치겠다는 제주 진공계획을 세웠다.

미군이 194410월 필리핀을 점령하자, 이어 제주도도 공격할 것을 예상한 일본은 즉각 제주도에 대한 경비를 강화했다.

임시정부도 국내로 진입하기 위한 중요한 기지로 제주도를 염두해두고 있었다.

김구 선생은 미군 측에 국내 진공작전을 제안한다.

당시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가 제주도에 거점을 확보하면 국민들이 적극 호응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문 지사는 임시정부가 제주도로 진공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문 지사는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해 국내에 있는 일본군의 군사 시설과 동향을 조사·탐지해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또 국내 진공 시 이에 호응할 청년들을 조직하는 임무도 맡았다.

당시 백창섭 지사(1916~2004)도 국내공작위원회의 또 다른 비밀공작원으로 같은 임무를 받고 국내로 파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문 지사는 같은 해 8월 초 부산에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고 복역하다가 해방 후 출감했다.

안타깝게도 문 지사는 1949512일 고문 후유증으로 47세의 나이로 부산 영선동에서 순국했다.

김구 선생이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되기 1개월 전의 일이다.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소재한 문덕홍(1902~1949) 애국지사의 묘소.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소재한 문덕홍(1902~1949) 애국지사의 묘소.

문 지사의 운구는 한림읍 동명리 선영에 안장됐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순국한 지 46년 만인 1995815일 광복 제50주년을 기해서 고인의 묘역에 제주도 재향군인회가 문덕홍 지사 독립항쟁기념비를 건립했다.

광복군 총사령부 부관과 광복회장을 역임한 윤경빈씨는 1997년 제주를 찾아 역사가 김찬흡 선생에게 문 지사가 충칭에서 김구 선생과 기념사진을 촬영할 당시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며, 내가 문 지사의 후임 경호실장을 지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문 지사의 장녀 문송자씨(76)제주 한림에서 태어나 부산으로 건너간 기억은 어렴풋이 생각나지만 너무 어려서 아버지에 대한 뚜렷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지금은 고인이 된 오빠(문재선씨)에게 독립운동을 하시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자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씨는 어머니까지 일찍 여의고 어렵게 자랐지만 아버지께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을 알았기에 평생 원망하지 않았다남은 우리들도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나가 서로 보답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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