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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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읍내라 생존환경이 시내보다 썩 좋아선지 길고양이가 흔하다. 작은 숲이 집 주위를 두른 것도 좋은 조건일 테다. 제 집처럼 나고 들게 피차 친숙해 있다. 고양이에게 욕하면 해코지한다는 속설이 있어 내쫓는 시늉커녕 부러 눈을 돌려 버리기도 한다. 녀석들이 아주 경계를 풀고 산다.

한번은 어미가 새끼 다섯을 거느리고 마당 큰 돌에 늘어지게 누웠다. 새끼들이 젖을 빨다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내 어미젖에 매달린다. 어미에게서 별일 없으니 젖이나 먹으라는 걸 벌써 숨결에서 느꼈을지 모른다. 고것들 참 앙증맞다. 젖을 내맡겨 길게 누운 어미 모성도 감탄감이다.

몇 번인가. 먹이를 찾아 헤매는 낌새라 안쓰러워 먹거리를 줄까 하다 그만 뒀다. 연(緣)이란 맺으면 무 도막내듯 못한다. 정이 들어 깊이 품기 시작하면 그만큼 책임도 따른다. 끝까지 품어주지 못할 거면 아예 거두지 않아서 좋다.

퍼뜩 기억 속에 떠오르는 개와의 찜찜한 사연. 진돗개 붙이라 하매 애지중지 키우던 한 녀석이 있었다. 털이 눈부신 백구였다. 끔찍이도 아꼈다. 손수 먹이고 씻어 주고 산책하고 목줄을 풀어놔 마당에서 놀기도 했다. 한데 녀석이 울 밖 덤불숲에 데리고 가 오줌을 누이는데 갑자기 내 손을 무는 게 아닌가. 상처는 크지 않았으나 충격이었다. 충성은 고사하고 저를 아끼는 주인을 물다니. 인연이 다한 거라 여겨 곧바로 옆집 과수원으로 보내고 말았다.

우리가 클 땐 반려동물이란 말이 없었다. 애완에서 발전해 성장한 말이 ‘반려(伴侶)’다. 벗이란 뜻이다. 애완이 장난감처럼 귀여움을 받고 즐거움을 준다는 말인 데 비해, 반려는 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이라 함이다. 더 친밀하게 개칭됐다.

날로 물질의 풍요 속에 자기중심적이고 정서는 고갈돼 간다. 순수를 간직하고 있는 동물과 접함으로써 잃어 가는 본연의 성정(性情)을 되찾으려는 목마름에서 만난 게 반려동물이다. 그런 감성이데올로기가 그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격상시켰을 법하다. 반려동물은 사유재산이다. 구조한다고 동의 없이 데려오면 절도죄가 성립될 정도다.

개, 고양이, 햄스터, 새, 금붕어, 이구아나, 카멜레온 등 반려동물의 가짓수도 불어나는 추세다. 엊그제 TV에서 돼지를 끌어안고 함께 놀고 교육시키는 예쁘장한 소녀를 보고 기겁했다. 새끼 때 손에 넣었다는데 몇 달 만에 몰라보게 커 버려 비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무려면 집 안에 돼지를 풀어놓고 살다니.

어쨌든 반려동물의 중심은 개와 고양이다. 수에 있어 개가 절대 우위일 것인데, 반려동물로서 문제가 많은 것 같다. 동물권 단체 ‘케어’에서 지난 4년 간 구조한 동물 수백 마리가 무분별하게 안락사 당했다는 내부 폭로가 나와 파장이 일고 있다. ‘학대 받는 동물의 수호천사’요, ‘유기견의 대모’라 불리는 사람이 그랬다지 않은가. 상당수는 병들거나 아프지 않은 건강한 개체였다 해 그 파장이 더욱 드높다. 대표가 보호소에 도축 업자를 채용했다 하므로 충격을 더하고 있다. 불투명한 후원금 사용도 간과할 일이 아닐 것이다.

‘반려’는 인격이다. 보듬지 못할 거면 짐승으로 차가운 대상의 세계에 남아 있어야 했다. 사랑하게 됨으로써 고통이 생긴다. 안고 가는 건 사람의 몫이다. 지키고 거두지 못할 바엔 아예 반려로 삼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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