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주서 항일 운동에 불을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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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범·김시은 등 제주서 독립운동 모색…14명 동지 결성
3월 17일 조천 미밋동산서 발의·21~24일까지 4차례 전개
서귀포 어촌·삼매동 등 제주 곳곳으로 시위 확산에 영향
조천만세운동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매년 3월 1일마다 조천만세동산에서 재연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펼쳐진 재연 행사 모습.
조천만세운동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매년 3월 1일마다 조천만세동산에서 재연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펼쳐진 재연 행사 모습.

조천만세운동은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 현재까지 재연행사가 이어지면서 매년 31일이면 조천만세동산은 태극기와 만세 함성으로 물들고 있다.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던 1919년 당시 제주지역에서는 김시범, 김시은 등이 전국 각지에서 조국 독립을 선언하는 시위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듣고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주 조천 출신으로 휘문고보 4학년이자 김시범·김시은의 조카인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제주로 귀향하면서 조천만세운동 계획이 구체화됐다.

김시범은 김시은, 김장환과 함께 317일 제주시 조천의 미밋동산(현 만세동산)에서 거사를 발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선 결과 고재윤과 김형배, 김연배, 황진식, 김용찬, 백응선, 박두규, 이문천, 김희수, 김경희, 김필원 등 11명이 합류, 14인의 동지가 결성됐다.

이들 14명의 거사 동지들은 제주지역 유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의 기일인 321일을 거사 일로 정하고, 대형 태극기 4본과 소형태극기 300여 장을 마련하는 등 시위 준비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김유배, 김순탁, 문봉기, 김운배, 윤주진, 고원륜 등이 시위대에 추가 가담했다.

조천만세운동은 321일부터 24일까지 4차례 연속해서 전개됐다.

1차 시위가 벌어진 321일 아침 조천 미밋동산에 모인 14명의 동지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미밋동산에서 조천 비석거리까지 행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500여 명의 주민들이 동참했다.

이날 오후 3시 미밋동산으로 돌아온 시위대는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후 시위를 보다 확대하기 위해 김시범과 김시은, 김장환, 황진식 등 4명이 주도해 제주 성내를 향해 시위행진을 강행했고, 결국 신촌리에서 경찰과 대치하게 된다.

당시 제주경찰서 조천주재소에는 5명의 경찰이 배치돼 있었는데 해당 인력만으로 시위대의 행진을 저지할 수 없자 급히 제주경찰서에 증원을 요구했고, 이에 30여 명의 순사가 합류, 시위대와 충돌하게 된다.

1차 시위에서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13명이 연행됐는데 여기에는 14인의 동지 중 김시범, 김시은, 김용찬, 고재윤, 김형배, 황진식, 김장환, 김경희, 김희수 등 9명이 포함됐다.

322일에는 조천장터에서 백응선, 박두규, 김필원 등의 주도하에 2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날 연행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2차 만세 시위가 전개됐다.

시위대는 신촌리를 향해 행진에 나섰지만 이 과정에서 2차 시위를 주도했던 박두규와 김필원 등이 치안방해를 이유로 연행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게 된다.

323일에는 조천 오일장터에서 백응선과 김연배, 이문천 등의 주도하에 연행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3차 시위가 전개된다.

특히 이문천은 약 100여 명의 시위대를 지휘해 함덕리로 시위행진을 강행했는데 함덕리에서 주민과 청년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가 800여 명으로 증가하는 등 시위 규모가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다.

324일 전개된 4차 시위는 마침 당일 조천 오일장이 펼쳐지면서 장을 보러 나왔던 부녀자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 김연배를 중심으로 무려 1500여 명의 시위대가 만들어지면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전개됐다.

하지만 이날 4차 시위 과정에서 김연배 등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조천만세운동을 이끌었던 14명의 동지 모두가 검거됐고, 결국 만세운동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이 운동의 영향으로 서귀포 일부 어촌에서 해상 만세 시위가, 서귀포시 삼매봉에서도 만세 시위가 잇따라 전개되는 등 만세운동이 제주 곳곳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천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조천만세동산에 세워진 기념탑.
조천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조천만세동산에 세워진 기념탑.

조천만세운동으로 인해 14인의 동지를 비롯해 29명이 기소됐고, 이 중 23명이 19194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핵심세력인 14인의 동지는 이에 불복해 항소하면서 1919529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제1부에서 형이 선고됐다.

당시 김시범과 김시은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고 황진식, 김장환, 김필원, 김희수, 이문천, 박두규, 김연배는 8, 김용찬과 고재윤, 김형배, 김경희, 백응선은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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