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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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촛불은 제 몸을 불사른다. 어둠의 세상을 밝히는 희생이다. 촛불은 연약해 작은 바람에도 꺼진다. 하지만 모이면 온 세상을 채워 가는 결집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난다. 아침을 기다리는 희망이다. 염원이 서려 있다.

촛불은 흐름을 만든다. 작은 흐름이 큰 흐름으로 번진다. 그게 민중에 닿아, 마침내 일렁이는 바다가 된다. 거기엔 강요가 없다. 지시도, 앞장서는 지휘자도 없다. 시대를 절규하되 그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바닥에 소리를 압도하는 무게가 있다. 세상을 장악하는 침묵의 무게다.

개미구멍이 거대한 방죽을 허문다. 하나의 촛불이 다른 촛불로, 모여든 빛의 결합은 암흑의 밤을 몰아내 여명의 시간을 바싹 끌어당긴다. 불탈수록 어둠은 엷어지고 빛의 공간은 넓혀진다. 확산하는 빛은 점차 너울로 요동친다.

촛불을 든 이들은 민초다. 애초 그들의 선택은 일탈이 아니다. 촛불을 밝히고 광장으로 나섰을 뿐이다. 그대로는 울분만 쌓이므로, 입 앙다물고 있으면 냉가슴 앓게 되니까 나선 것이다. 내남없이 덩어리로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 갔다. 이 시절 인연들이 견고한 벽을 넘어 소리 내며 강물로 흘렀다.

실험하려 한 게 아니다. 누가 무얼 극구 주장하려 하지도 않았다. 네게, 그에게 일어서라 명령한 적 없다. 하늘을 우러러 착하게 살아온 여염의 갑남을녀들이 하나둘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당초에 자발적 동참이었다. 애써 모이려 한 게 아니고, 무엇에 저항하려 한 것도 아니다. 다만, 사그라져 가는 꿈을 되찾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목전의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을 걷어 내려 허우적거린 거다.

급기야 촛불이 붉게 타올라 광장을 밝혔다. 자발적 동참은 힘을 모으려 악쓰지 않아도 됐다. 자체로 힘이었다. 피를 흘리거나 힘을 휘두르지 않은 촛불은, 그렇게 비폭력 시민운동으로 작동했다. 그랬나? 부지불식중 우리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직접민주주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주말마다 촛불을 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총 20회까지 열려 참여자가 누적 인원 1500만을 넘어섰다. 종국에,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에서 탄핵소추안을 인용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을 직에서 파면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헌정사에 최초로 재임 중 탄핵으로 물러난 대통령이 됐다. 그는 지금 교도소에 갇혀 있다.

촛불집회의 주체는 깨어 있는 다수의 시민들이었다. 폭력을 수반하지 않은 평화적 시위가 부당한 권력을 심판했다. 촛불에 세계가 놀랐다.

이 대목에서 황금찬 시인의 <촛불>이 떠오른다. 남아 있을지 모를 우리 안의 어둠마저 몰아내 청산하고 싶다.

“촛불!/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때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신을 배운/ 조용한 희생일까.(후략)”

종당에 남는 구절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이것이 요 몇 년 사이 우리가 경험한 촛불의 숭고함이었다. 어두움을 밀어낸 건 그 연약한 저항, 그러나 무섭게 타오른 그 분노, 우리는 충분히 위대했다.

촛불은 시대의 물결, 시대의 빛이었다. 다만 어느 집단이나 개인을 위해 타올랐던 게 아님은 너무도 자명하다. 촛불은 순수했다. 희생이었다. 그걸, 경건하게 가슴에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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