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 서귀포의 원동력, 이중섭과 한묵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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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

얼마 전 재불 화가였던 한묵(1914-2016)의 유작전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한묵 화백님의 미망인도 만나 뵐 겸 다녀온 전시였는데, 한묵의 작품 앞에 서니 22세기의 세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한묵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난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도 가장 한복판에 살면서 그림을 그려야 해. 10년에 한 번씩은 내 작품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난 견디지 못해.”,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진정한 예술가의 길이 아니야.”

그랬다. 한묵은 1961년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48세에 교수직도 그만두고 프랑스로 떠났다. 그리고 2016년 파리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식당의 접시 닦기 등으로 얻어진 수입과 그를 아끼는 몇몇 컬렉터들의 그림 값으로 10여 평 남짓한 월세방에서 생활했다. 소탈하고 낙천적인 그의 성격은 생활고 속에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는 에너지원이 됐다.

평생 사치라고는 없었던 삶, 오로지 예술의 진정성을 추구했던 생애. 그의 평생에 화려함이 있었다면 작품에서 울려 퍼지는 원색 빛의 향연이었다. 그랬다. 그는 끝없이 광활하고 신비로운 우주의 새로운 질서로 생명의 근원을 표현하기 위해 화려한 원색과 기하학적 형태로 추상화를 구현해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가 됐다.

1914년 서울 출생인 한묵은 1932년 만주의 미술연구소와 1935년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1944년부터 금강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중에 이중섭(1916-1956)과 친분을 쌓았다. 6·25 때는 종군 화가로서 전쟁의 참혹함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했던 한묵의 모습은 어찌나 이중섭과 닮았는지 한묵의 작품 위로 이중섭의 마지막 정릉 모습이 중첩돼 가슴이 아려왔다. 한묵은 이중섭이 사망하기 전까지 정릉에서 함께 자취를 했다. 당시 그는 독신이었고 이중섭이 누구보다도 편안하게 생각했던 친구였다. 한묵의 정성어린 도움으로 이중섭은 스케치를 하고 삽화와 표지화를 그리는 등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점차 거식증으로 영양이 부족한데다 황달이 심해지자 한묵은 이중섭을 다시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간염 증세가 악화돼 1956년 9월 6일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2007년, 한묵은 이중섭의 피난지 서귀포를 찾았다. 5·16도로를 타고 서귀포로 가는 길에 한묵은 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감격해서 말했다.

“나무, 바다, 구름, 그리고 이 구불구불한 길까지 너무 아름다워. 제주하늘은 참 그림도 잘 그린다. 파도! 서귀포 앞바다의 저 하얀 파도를 보면 중섭이가 손짓을 하며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중섭이를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 중섭이가 싸우는 소를 그렸다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내가 제주에 온 것이 참 신기해. 아마 중섭이가 나를 불렀나봐. 필시 중섭이가 나를 이곳으로 부른 거야.”

치열한 작가정신과 창작의지로 우리에게 위대한 예술작품을 남긴 두 화가의 인연은 서귀포에도 작은 흔적을 남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흔적이 바로 문화도시 서귀포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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