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1 만세 이끈 ‘소녀결사대’…조국 위해 불꽃처럼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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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숙, 소녀결사대 79인 리더…한국 최초 여성 교육감
고수선, 국가동지회 활동…제주 여권 신장 운동 이끌어
강평국, 제주 여성 문맹 퇴치 앞장…독립유공자 서훈 촉구
제주 출신 여성 독립운동의 선각자들. 사진 왼쪽부터 최정숙, 고수선, 강평국.
제주 출신 여성 독립운동의 선각자들. 사진 왼쪽부터 최정숙, 고수선, 강평국.

제주 출신 최정숙(1902~1977)·강평국(1900~1933)·고수선(1898~1989) 선생은 19193·1만세시위 때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여자고등학교)의 학생시위를 주도했고, 이후 문맹퇴치와 여권신장,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선각자들이다.

이들은 제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현재 신성중·고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했다.

경성여고보 재학 중이던 1919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최정숙 선생은 당시 79명에 이르는 소녀결사대를 이끌고 시위에 나서다 체포돼 그 해 11월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약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최정숙은 경상여자의과전문학교에 도전해 극빈환자들을 위한 정화의원을 개원했으며, 이후 모교인 신성여고 초대교장을 역임했다.

196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감이자 제주도 초대 교육감으로 선출됐다.

1981년 11월 10일, 제주시 황사평 묘역에 고수선(사진 맨 왼쪽)을 비롯한 친우, 제자 등이 강평국의 뜻을 기리는 ‘강평국 선생 추도비’를 세웠다.
1981년 11월 10일, 제주시 황사평 묘역에 고수선(사진 맨 왼쪽)을 비롯한 친우, 제자 등이 강평국의 뜻을 기리는 ‘강평국 선생 추도비’를 세웠다.

고수선 선생은 강평국 선생 등과 함께 경성여고보 재학 중 국가동지회 활동을 하며 3·1운동에 참여했으며, 졸업 후 충남 농산공립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자금을 모금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일본의 감시가 강화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했으나 19223월 귀국 직후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수선은 1990년 제주 여성 최초 독립유공자 서훈(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제주 여성 최초로 의사면허를 취득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제1대 도민회(도의회3대 민의원(국회의원)에 출마했으며, 제주여성청년회(1925) 초대회장 등 여성·사회 운동에도 앞장서며 여권 신장 운동을 이끌었다.

강평국 선생 역시 졸업 후 전남 진도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체포돼 고문을 받았다.

그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으로 년국(年國)’이라는 이름을 평국(平國)’으로 바꾸기도 했다.

강평국 선생은 제주 최초의 여성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건강 악화로 193311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2512월 제주에 모인 이들은 80여 명의 여성들과 함께 '제주여자청년회(초대 회장 고수선)'를 창립했다.

제주 여성의 지위 향상이 목표였다.

1967년 5·16 민족상을 수상한 최정숙 선생(사진 가운데)의 모습.
1967년 5·16 민족상을 수상한 최정숙 선생(사진 가운데)의 모습.

앞서 최정숙과 강평국은 1921년 제주 여성 문맹 퇴치를 위한 여수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훗날 최정숙과 고수선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각각 대통령 표창, 건국훈장을 받았으나, 아쉽게도 강평국은 여전히 독립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상태다.

고수선 선생의 아들 김률근 선덕어린이집 이사장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제주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 되길 바란다강평국 선생이 하루 빨리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길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성학원 총동문회는 지난 1일 오후 2시 제주시 관덕정 일대에서 독립의 불꽃 다시 일어나라를 주제로 3·1운동 100주년 기념 행사를 열고 최정숙·고수선·강평국의 업적을 기리고 강평국 독립유공자 서훈 촉구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나라에 봉사하는 길은 여성도 공부 하는 길강평국 선생, 여성 교육 보급 앞장

강평국 선생은 19006월 제주시 일도동에서 강두훈과 홍소사의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이듬해 발발한 이재수란 때 천주교도였던 부모를 잃은 그는 1910년 신성여학교에 입학해 1915년 최정숙·고수선 등과 함께 제1회로 졸업했다.

이어 진명여고보를 거쳐 경성여고보 사범과에 진학한 그는 독립운동 학생 비밀 서클을 조직해 교내 항일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그와 함께했던 대한민국 최초의 여기자인 최은희나 제주 출신 고수선이 강평국을 학생투쟁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꼽을 만큼 그의 역할은 컸다.

1920년 최정숙 선생과 함께 제주에서 여수원을 개설해 여성 문맹 퇴치와 교육 보급에 힘썼고, 1925년에는 최정숙, 고수선 선생 등과 함께 제주여자청년회를 조직해 여성 의식 향상과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1926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해 도쿄조선여자청년동맹의 초대 집행위원장을, 같은 해 창립한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 부인부 책임자로도 활동했다.

1928년 여성단체인 근우회 일본지부를 창설해 목포 출신 소설가 박화성과 함께 도쿄지회 의장단으로 활약했다.

1933년 늑막염이 악화돼 귀향했으나, 백청련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광주로 구인됐다가 지병이 악화돼 3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강평국 선생은 생전 나라에 봉사하는 길은 여성도 공부를 하는 길이다. 공부하다 졸음이 오면 대한독립만세를 불러라. 이 나라는 기필코 독립이 되어야 한다. 독립을 위해서 몸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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