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을 믿지 못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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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주 수필가

‘침묵이 금’이라는 말이 삶의 금언처럼 여기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웅변이 금’이라는 상반된 말이 그 자리를 차지한 듯하다. 앞 말은 말을 함부로 많이 하지 말라는 것이고, 뒤 말은 자기 생각이나 주장은 서슴없이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의미다. 모두 다 시대의 처세관을 반영한다. 지난 시대는 자신의 처신을 낮추고 함부로 나대지 않는 게 삶의 본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을 한껏 내 보여야 살아가는데 유리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는 의·식·주라할 수 있다. 이를 빼놓고 본다면 말만큼 중요하면서도 많이 하는 행위가 없다. 더불어 살아가려면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필요하고, 그 수단이 말하고 듣는 것이니 불가피한 행위다. 인간사 길흉화복이 말에서 비롯되는 이유도 말하는 게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말을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는 뜻으로 침묵을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삶의 당연한 이치다.

거기다 운명의 귀는 내 말을 엿듣는다는 경구까지 덧대어 입 열기를 더욱 두렵게 한다. 말을 함부로 내뱉다보면 자신의 운명도 말처럼 아무렇게나 되어간다는 뜻이니 어찌 말을 함부로 지껄일 수 있을까.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슬픈 노래를 불러서 저절로 슬픈 운명에 처하게 된 가수가 있다는 말이 항간에 떠돌기도 했다.

물론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지만 부정적인 노래나 말보다 긍정적인 말이나 노래가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건 우리가 쉬 경험하는 일이다. 그래서 한 때는 행복을 구가하는 노래가 많은 유행을 타기도 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 자신의 실수를 호되게 질책 받은 소년은 커서 독재자(조셉 브로즈 티토)가 되었고, 같은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 받은 소년은 대주교(풀턴 쉰)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를 방증하는 적절한 예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찰한 옛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혼을 낼 때도 말을 가려서 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잘못에 매를 들고 나서도 빨갛게 된 아들의 손에 입을 맞추며 "사랑하는 아들아, 너에게는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재능이 있단다. 너는 커서 반드시 훌륭한 일을 하게 될 거야”라는 훈계를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입은 화가 드나드는 문이라는 의미의 구시화문(口是禍門)이란 말도 많이 회자된다. 고금의 역사를 보면 말로 인해서 재앙이 초래된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오늘의 언론이나 정치 현실만 봐도 말이 화근(禍根)이 되어 시비나 정쟁이 초래되고, 그로 말미암아 그런 화를 자초한 사람은 온갖 지탄을 받으며 갖은 수모를 겪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기주도 그의 저서 ‘말의 품격(2017)’에서 “삶의 지혜는 듣는 데서 비롯되고, 삶의 후회는 말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거짓과 과장으로 점철된 막말들이 난무한다. 언론 매체의 보도 내용은 물론 개인끼리 주고받는 말마저 서로 믿지 못한다. 불신사회다. 내가 듣고 말하는 것들은 과연 진실한가, 따져 듣고, 가려 말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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