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곳곳 수호하는 상징물…주민 안녕과 번영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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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유수암과 오방석
애월읍 유수암리 흐르는 용천수…깨끗한 수질로 전염병 예방
오방석 마을 중앙과 동서남북 위치…잡귀 침범 못하도록 막아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유수암천은 옛부터 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마을 주민들은 이 물이 마을을 대대로 지켜왔다고 믿고 있다.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유수암천은 옛부터 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마을 주민들은 이 물이 마을을 대대로 지켜왔다고 믿고 있다.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들이 자리한 중산간 지역 중에서도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다. 해발 200~250m 높이에 위치한 마을로 큰노꼬메오름 등 여러 개의 오름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유수암의 옛 이름은 흐리믈(우물)’검은데기(바위언덕)’ 등이다.

생수가 용출해 사계절 끊이지 않고 물이 흐르는 언덕이란 뜻으로 흐리물이란 지명으로 오랫동안 불리다가 지금은 유수암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라산의 물이 표토 중간층에서 저류돼 용출한 유수암천(流水岩泉)’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된 셈이다. 주민들은 이 물이 마을을 대대로 지켜왔다고 믿고 있다. 여름철에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며 호열자(콜레라) 등 각종 수인성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도 유독 이곳만은 비켜 갔다는 것이다.

유수암리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마을을 지키는 다섯 개의 상징석인 오방석도 눈 여겨볼만하다. 오방석은 마을에 잡귀와 잡신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 번영과 건강을 위해 세운 바위이다. 오방석은 무석신화와 비보(裨補)풍수, 주역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전통사상이자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유산이다.

전염병도 비켜가게 한 식수원=유수암천은 지명이 뜻하는 것처럼 옛부터 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유수암리(流水岩里) 마을을 따라 흐르는 용천수이다.

고려시대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 대항해 최후까지 싸운 장소인 제주항파두리항몽유적지(사적 제396)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데 당시 삼별초는 애월읍 상귀리에 있는 구시물과 옹성물 이외에도 이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물통을 확장했으며, 1960년대 초반 공동수도를 가설할 때에 이웃 장전과 소길 양리에서 이 물을 끌어가기도 했다.

제주4·3 당시에 마을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리자 산물이 흐르지 않았다가 난이 평정되고 사람들이 다시 모여 마을을 재건하자 다시 솟아났다고 한다.

유수암천이 지금처럼 깔끔한 모습을 갖춘 것은 198710월이다.

마을에서는 항상 깨끗한 수질과 풍부한 수량으로 인해 단 한 번도 호열자(콜레라)같은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았고, 마을 주민들 중에서도 중병을 앓다가 죽은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200고지 이상 산간 마을 중 시간당 13000의 생수가 솟아나는 곳은 제주도 일원을 통틀어 유수암천뿐이다.

 

유수암리 마을 중심부를 지키고 있는 중황석.
유수암리 마을 중심부를 지키고 있는 중황석.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오방석은 중황석(솔동산 돌), 동선돌, 서선돌, 남모난돌, 북왕돌 등 다섯가지 바위를 뜻한다.

오방석은 마을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에 위치해 마을 주민들이 신성시해왔다.

오방석이 본래 수호신으로 마을의 액운을 막아줘 천화나 인화는 물론 역질이나 고질병을 예방해준다고 믿어온 것이다.

먼저 리사무소를 지나고 마을 안길로 들어가면 커다랗고 웅장한 폭낭(팽나무)이 위용을 드러낸다. 유수암 마을 중 이 지역을 속칭 솔동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 위치한 중황석은 마을의 중심부를 지키고 있다. 선인들은 이 거대한 돌의 모양을 저울 또는 저울추에 빗댔는데 마을의 중심지에 있으면서 균형 있는 발전을 주도하거나, 그러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내재된 것이다.

 

마을 동쪽을 책임지고 있는 수호신인 동선돌.
마을 동쪽을 책임지고 있는 수호신인 동선돌.

인근에 위치한 동선돌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동산 위에 우뚝 서서 마을의 동쪽을 책임지는 수호신이다. 한자어로는 동입석(東立石)이라고 하며, 완여필봉형(完如筆鋒形)이라고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충혼비 대석으로 쓰였던 서선돌.
한국전쟁 이후 충혼비 대석으로 쓰였던 서선돌.

서선돌과 관련해서는 조성 중엽 이씨 집안의 귀복이란 종이 주인으로부터 호된 질타를 받고 화풀이로 쓰러뜨렸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한국전쟁 이후 충혼비와 순국자명단비의 대석으로 이용돼 오다가 2007년 일으켜져 원래 모습으로 복구됐다. 선인들은 금퇴형(金堆形), 즉 돈이 쌓인 형이라고 했다.

 

남모난돌은 세 개의 왕석이 거의 접해 있다.
남모난돌은 세 개의 왕석이 거의 접해 있다.

남모난돌은 우리나라나 일본의 고고학자들이 고인돌이 아니냐고 의문을 남기기도 한 돌이다. 높은 동산에 크고 작은 세 개의 왕석이 거의 접해 있다. 선인들은 코끼리형으로 부르기도 했다.

 

선인들은 북왕돌을 수문장형(守門將形)이라 했다.
선인들은 북왕돌을 수문장형(守門將形)이라 했다.

북왕돌은 원래 길 한가운데 있었지만 도로를 확장하는 바람에 위치를 옮기게 됐다. 선인들은 수문장형(守門將形)이라고 했다.

진주리 기자 bloom@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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