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고여덟 살의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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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소요사태에서 1954년 9월 21일 사이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도민을 상대로 각각의 집단들이 모두 학살에 가담하거나 조장·방관해 그 누구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끔찍한 비극이었다.

사망자 3만을 훨씬 넘는 제주 근·현대사 최대의 참사다. ‘내통·밀고·가담했다,’ 이념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여 수라장이 됐던 섬 제주. 빨갱이라며 무고한 양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런 원통한 일이 있으랴. 박한 땅 일궈 입에 풀칠하고 아이 키우며 시름 달래던 착한 사람들이다.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죽어갔다. 한마디로 요약해, 절해고도 제주는 거대한 감옥·학살 터였다. 슬픔의 섬, 죽음의 섬, 침묵의 섬이었다. 얽힌 게 한둘인가. 71주년을 맞아도 정명(正名)을 못 갖는 이유다.

나는 4·3 때 일곱 살이었다. 철부지에게 각인돼 잊히지 않는 일들이 있다.

산에서 내려온 폭도들이라 했다. 다섯 가호 골목 한 집과 동산 집에 불을 질렀다. 불길이 바람에 하늘로 치솟았다. 골목 끝에 있는 우리 집으로 불티가 날아들었다. 이때, 옆집 노인이 우리 집 지붕 위에 올라가 멍석을 덮으며 소리 질렀다. “이 무지막지한 놈들아, 왜 사람 사는 집에 불을 놓느냐.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놈들아!” 불빛에 노인의 눈이 시뻘겠다. 시커먼 얼굴을 한 그들은 노인을 힐금 쳐다보다 급히 사라졌다. 노인의 악다구니에 뭐라 대꾸했는데 기억에 없다.

밤이면 폭도가 내려온다고 동네 사람들이 떼 지어 바닷가로 내렸다. 산으로 끌려간다고 피신한 것이다. 가슴 쿵쾅거리다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어 잠들곤 했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가 곤밥에 돼지고기를 내놓고 어서 먹어라 한다. 없던 일이라 어리둥절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에 한 번 집에서 기르는 돼지를 잡아 나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 먹다 죽자는 소릴 들었다. 슬픈 시대를 아파할 줄 모르던 나는 끼마다 포식했다.

초등학교에 방화했다. 한밤중 학교에서 솟은 불기둥이 마을을 밝혔다. 나중 운동장에 갔더니 검게 그을린 기와 조각이 발에 챘다. 가슴 울렁거렸다. 이듬해 입학한 나는 교실이 없어 학교 뜰 나무 아래 기댄 칠판을 마주해 공부했다. 비 올 땐 천막 속으로 기어들었지만 이내 옷이 젖어 오소소 떨렸다. 교과서도 없었다. 마분지와 심이 거칠어 종이가 찢기던 연필이 생각난다.

하굣길, 고샅에서 동네 사람들이 창을 만들고 있었다. 폭도에 맞서자니 죽창으론 안됐던 모양이다. 풀무질하며 쇠를 벌겋게 달궈 망치로 두드리고 물에 담그는 작업이 한창이다. 창이 만들어져 청년 둘이서 들고 싸우는 시늉을 했다. 재미있어 침 흘리며 구경하고 있는데, 내 눈이 번쩍했다. 그러곤 그만 까무러쳤다. 창에 내 왼쪽 눈이 찔린 것이다. 한 아주머니가 집으로 달려가 소주와 솜뭉치를 갖고 와 내 눈언저리에 붙이자 나는 팔딱팔딱 뛰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약이 없던 시절, 그나마 다행이었다. 눈 꼬리 쪽에 흉터가 있다. 창이 조금만 깊었다면 어찌됐을까. 실명했을지도 모른다.

일고여덟 살 적 얘기다. 4·3특별법개정안이 통과되기를 갈망한다. 봄이 봄 같지 않다. 70년 세월이 지나도 제주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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