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조선국’ 세 글자 써 보였더니, 차와 죽을 대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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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능, 조천 만세운동 참여
김배회, 표류 끝에 中 도착…성절사와 귀국
김범준, 도청 토목과장·제주항 공영소장 등 역임
김병구, 명진학숙 숙장
김병규, 한문서당 차려 훈학 앞장
김병기, 제주향교 전교·모범 공무원
1948년 5월 미군이 상공에서 촬영한 제주항의 모습이다. 왼쪽으로 주정공장, 위쪽으로 동문로, 당시 오일장의 모습이 확인된다. 1952년 10월 1일 제주항이 국제항으로 승격되면서 김범준은 제주항 공영소장에 발령됐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48년 5월 미군이 상공에서 촬영한 제주항의 모습이다. 왼쪽으로 주정공장, 위쪽으로 동문로, 당시 오일장의 모습이 확인된다. 1952년 10월 1일 제주항이 국제항으로 승격되면서 김범준은 제주항 공영소장에 발령됐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조천리 양천동에 있는 김충환의 묘비.
조천리 양천동에 있는 김충환의 묘비.

김백능金百能1898(광무2)~?,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 당시의 항일 활동. 일명 김충환金忠煥, 산북 조천리<이동梨洞>에서 태어났다.

동년 4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지 않았다.

김장환은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제주에 들어 왔는데, 김시범은 김시은, 김장환과 함께 317일 경 조천리 미모치味毛峙(미밋동산)에서 거사 발의를 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319일까지 규합된 인원은 14명의 동지인 김시범, 김시은, 고재륜, 김형배, 김연배, 황진식, 김용찬, 백응선, 김장환, 박두규, 이문천, 김희수, 김경희, 김필원 등이다. 김백능도 거사동지로서 이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제주경찰서 조천주재소에는 간타<神田> 순사부장, 순사 2, 보조원 2명 등 5명의 배치되어 있었다.

김배회金杯廻표류한 제주인, 1470(성종1) 8월 김배회金杯廻 7명이 제주에서 진상물을 서울까지 수송하고서 되돌아오는 길에 큰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13일 만에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도착했다.

성절사聖節使 한치의韓致義편에 귀국했고, 이 일은 성종 임금에게 보고됐다.

성종실록 2년 정월 7일부터 8일에는 표류인에 대한 구호 상황과 성절사 편에 돌아오는 과정이 실려 있다.

성종 2(1471)과 정월 7일 경진庚辰, 성절사聖節使 한치의韓致義가 중국 예부禮部의 외교문서를 갖고 왔다.

그 내용에 말하기를 조선 전라도 나주에서 바람을 잘못 만나 표류한 김배회金杯廻 7인을 보냅니다. 각 사람에게 절강浙江 포정사 절에서 두꺼운 솜 도포와 바지와 신을 지급해 주었고, 아울러 따라온 기물들을 갖고서 조선에서 북경으로 보내온 성절사 한치의 등에게 거두어서 데려 귀국하도록 이미 갖추어 황제皇帝에게 아뢴 이외에는 모름지기 공문을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성종 2(1471)과 정월 8일 신사辛巳, 승정원에서 김배회 등의 표류漂流했던 일의 그 내용을 임금께 김배회 등이 작년 1470년 제주로부터 공물貢物을 싣고 서울에 도착했고 일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가다가 큰 바람을 만나 무릇 13일을 표류해 중국 절강성浙江省 땅에 도착했는데 김배회 등이 조선국朝鮮國이라고 세 글자를 적어 배 위에 있는 사람에게 보이자 그 사람들이 우리 배로 와서 차와 죽을 먹여주었습니다. 김배회 등의 신원사항을 자세히 물어 보고 밥을 먹여주고, 또 쌀 10말을 주었습니다. 8명에게 모두 각각 털모자·푸른 무명·철릭·겹치마·바지와 신발을 주었습니다. 8일 동안 머물러 북경으로 압송하게 하고 거기서 5일 동안 머물다가 성절사에게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김범준金範峻한학자, 제주간이농업학교 중퇴, 제주대학 학장 문종철文鍾哲의 장인, 해방 후 194742일에 제주도청 토목과장을 지냈다. 이어 제주농업중학교(6년제)기성회장을 역임했다.

1950년 담수계淡水契 회원들과 함께 증보增補 탐라지발간 사업에 헌신했다. 소강小岡 김문희金汶熙, 두산頭山 백용석白庸錫,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 등과 함께 참여했다.

그는 1952101일 제주항이 국제항國際港으로 승격되면서 제주항 공영소장에 발령되었다. 19549증보탐라지를 프린트판으로 발간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향토역사와 향토문화를 이해시키는데 공헌한 바 크다.

김병구金炳龜1858(철종9)~1942(일제강점기), 선비, 훈장. 명진학숙 숙장, 자는 자옥子玉 또는 옥경玉敬, 호는 연수蓮叟. 본관은 광산이며 은암隱菴 김계담金桂淡의 아들로 주성州城 서문밖 도평都坪<벵듸>에서 태어났다.

명진의숙은 부친을 숙장塾長으로 추대해 재정적인 후원을 하게 하고, 자신은 교원이 되어 후진 육영에 힘썼다.

그는 제주향교 훈장을 역임하고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한학을 하던 선비들이 이응호李膺鎬를 중심으로 뭉쳐 우국론憂國論을 폈던 조설대朝雪台 12동지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김병구는 1927년 민족민중교육의 일환으로 향리에 명진학숙明進學塾이란 개량서당을 개설했다.

김병규金炳奎1832(순조32)~?(일제강점기), 고종 때의 서예가. 불법佛法에도 조예造詣가 깊었다. 호는 운감雲龕, 제주목濟州牧 목안 태생으로 동광양<과양>에서 한문서당을 차려 훈학했다.

훈학에 뜻을 두면서 필명筆名이 있었다.

불교적인 인생관으로 불경 해독에 심취했다.

그의 문하생 석성石惺 김석윤金錫允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다.

석성의 항일 의병 활동과 불법에 귀의한 것도 스승 운감의 사상에 크게 고무된 듯하다.

김병기金柄琪1924(일제강점기)~?, 제주향교 전교, 본관 나주, 호 귤헌橘軒. 세종의원 김순택의 선친.

제주시 영평寧坪<가시나->에서 제주면장 김기수金基銖의 만득자晩得子로 태어나 서귀포의 제주공립농업실습학교를 졸업, 제주시 모범 공무원으로서 오래 재임했다.

김병기는 오등리<오드싱>의 내조자 정순경鄭順景을 만나 52녀를 잘 키워 훌륭한 선비가 되도록 했다.

그래서 20157월 별세하니 제2오드승방이라 했다.

그는 제주향교의 전교典敎, 유도회柔道會 제주본부 회장을 지내며 문묘文廟와 명륜당의 전범典範을 바르게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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