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합성수지 사업으로 성공…1969년 제주은행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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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길, 1788년 제주판관 도임
김봉남, 물법계 신흥종교 창시자
김봉수, 추자 어민 항일 활동
김봉옥, 김녕중·애월중 교장 등 지내
김봉종, 제주시교육장 등 역임
김봉학, YMCA 이사장·천마학원 설립
제주시 이도1동 제주은행 본점 전경. 김봉학은 1969년 제주은행을 설립, 은행장으로서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제주시 이도1동 제주은행 본점 전경. 김봉학은 1969년 제주은행을 설립, 은행장으로서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김봉길金鳳吉제주판관. 1788(정조12) 1, 정연鄭鍊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908월에 떠났다.

김봉길의 이름이 새겨진 마애명이 방선문 바위에 있다.

김봉남金奉南1898(광무2)~1950, 종교 창시자. 물법계 신흥종교의 교조敎祖. 본명은 영근永根, 일명 영선 또는 재성再星 혹은 봉남奉南이라고 했다. 북제주군 우도牛島<-> 태생으로 한학을 공부했다.

그는 신병 치료를 목적으로 많은 종교 단체를 편력했는데, 보천교普天敎에서 강신降神·개안開眼·이보耳報 등의 체험을 하고 도통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손치성孫致成의 무량교無量敎를 믿던 황보흠皇甫欽을 만나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고, 황보흠의 영향을 받아 세 단계의 도각道覺을 이루고 교단을 형성했다.

53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자 제자들은 각기 물법 전수를 주장하며 수많은 종파를 형성, 삼법수도원, 천지대안교, 성덕도, 교화원, 태화교, 무량교, 용화삼덕교, 찬불교, 봉남교, 대한도교 그리고 삼천교 등 20여 종파로 대별됐다.

김봉수金奉守1898(광무2)~?, 추자면 영흥리<-구미> 태생이다. 김봉수는 추자도 어민들의 항일 활동에 참여했다.

이는 19265월 관제官制 어업조합의 횡포와 착취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어민들의 생존권 투쟁에 이은 폭발이었다.

김봉옥金奉玉1923(일제강점기)~2002, 교육자, 향토사학자, 호는 이농怡農, 김해김씨 좌정승공파 충방忠邦공계, 김행권金行權의 아들로 애월읍 고내리<고내->에서 태어났다.

애월교에 재학하다가 도일渡日, 도쿄의 아라가와<荒川>상업학교를 졸업, 부인 김양아金良娥와 사이에 42녀를 두었다.

일제 말에 모교 교사로 재임, 해방이 되어 애월중학교가 설립되자 초기 교사로 10년 재임했다.

조천중, 제주일중 교감 등을 거쳐 김녕중, 애월중 교장, 제주도사연구회 회장으로 족적足跡을 남겼다.

김봉옥은 제주향토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말년에 제주도문화재위원으로 재직했다.

김봉종金奉鐘1933(일제강점기)~2000. 교육장, 본관 경주, 김상림金祥琳과 어머니 김순金順 사이에서 석종石鍾에 이어 차남으로 제주시 이호리<오도롱>에서 출생했다.

전쟁이 발발한 195083018세 학생 신분으로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195581일까지 411개월간 복무했다.

해군 포병대대 3등 병조兵曹 당시인 1953116,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65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미국의 워싱턴, 텍사스, 펜실바니아 주립대학 등에서 해외파견 교육훈련을 받아 197012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는 미시간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교육행정학을 전공했다.

군복무 후 모교인 제주농업고등학교 강사를 거쳐 1959527일 고등학교 교원자격 고시검정 영어과에 합격, 19598월부터 196711월까지 동교 교사로 재직, 야간부로 1961년 제주대학교 법학과 졸업, 1967년 중등학교 1급정교사자격 취득 후 1970년까지 제주도교육위원회 중등교육과 장학사를 지냈다.

함덕농고·대정여고 교감(1971~73), 제주도교육청 인사계장·장학계장(1974~78) 등을 거쳐 김녕중·함덕종고 교장(1978~83), 제주도학생과학관장(1983~87), 중앙여고 교장(1987~89), 북제주군교육장(1989~91), 제주농고 교장(1991~93), 애월상고 교장(1993~95), 제주시교육장(1995~98), 제주도교육연구원장(1998~99) 등을 두루 역임했다.

김봉학金鳳鶴1922(일제강점기)~2001, 재일교포 실업가, 제주은행 창업자, 대한YMCA연맹聯盟 이사장, ·이스라엘경제협력협회 회장. 본관 김해, 아버지 김홍식金洪植과 어머니 황사라黃士羅 사이의 4남 가운데 장남으로 제주시 이도동에서 태어났다.

22세의 김봉학은 전남 화순和順에서 무연탄을 반입해 카네타연탄상회<金田煉炭商會>를 차려 목포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삼국상회三國商會와 연계되어 사업이 번창해 갔다.

조국 해방 이후 혼란기의 연속으로 사업도 수금이 어려워 뜻과 같이 아니 되자 1947년 고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전혀 연고도 없는 적지敵地로 도일渡日했다.

김봉학은 1950년대 후반 마침내 세 아우와 함께 힘을 합쳐 도쿄 아라카와구<荒川區>에 합성수지合成樹脂업체인 천마합성天馬合成을 창업하는 데 성공했다.

회사 규모가 불어나고 종업원 수도 1000여 명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조국을 위해 고향을 위해 투자하고 봉사하며 희생할 구상을 하기 시작했고, ‘어승생-오름일대의 황무지를 일구어 80만여 평에 이르는 들판에 대단위 목야지를 이루어 놓았다.

1973년 도산 위기에 놓인 제주주정공장酒精工場을 인수해 경유·중유 등 300여 드럼을 저장해 기름이 오르면 돈벌이했다.

1978년 대한YMCA연맹 이사장에 당선, YMCA동경회관東京會館 신축비로 1억원의 거금을 내놓았다.

또 천마장학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YMCA간사 양성기금으로 다시 1억원을 쾌척했다.

1978년 제주도 자유회관 건립문제가 제기되자 제일 먼저 15000만원의 거금을 내놓았고 그 뒤에 전국소년체전 성금으로 13000만원을 희사했다.

김봉학은 1969년 제주은행濟州銀行을 설립, 1969년부터 1976, 1982년부터 198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은행장으로서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남다른 경영철학과 기업이론을 갖고 동분서주하더니 제주은행을 경제계의 거목으로 성장시켰다.

19889월 제주상업고등학교를 인수한 일로서 육영사업에 손을 대었다.

이를 인수하고 천마학원天馬學園을 설립해 운영재단을 마련했다.

확고한 인생철학과 독실한 신앙심의 소산으로 사회에 환원한 여러 일을 한 결과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1972년 국민훈장 동백장冬栢章, 1991년 국민훈장 모란장牧丹章을 수상하고, 1989년에는 미국 국무성으로부터 공익봉사훈장을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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