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삼읍성 수호신…바람 등지고 웅장한 위용 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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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중석·수호석 등으로 불려
제주 3읍성 등에 48기 제작
1기는 일제강점기 때 분실돼 
몇 기는 잦은 옮김에 망가져
위치 이동 뚜렷하지 않기도

제주 돌문화의 상징인 돌하르방은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문헌기록에는 1754(영조 30) 김몽규(金夢煃) 목사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고 하며, 조선시대 제주 3읍성의 성문 앞에 모두 48기가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읍성(濟州邑城) 돌하르방은 24기 가운데 1기가 분실돼 현재 23기만 남아있고, 정의현성(旌義縣城) 12, 대정현성(大靜縣城) 12기는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19718월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현존하는 47기 가운데 1960년대 중반 제주읍성 동문 밖에 세워졌던 8기 중에서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입구로 옮겨진 2기는 제외돼 지금까지 45기만 문화재로 지정된 상태다.

돌하르방이란 명칭은 문화재로 지정할 때 붙여졌으며, 최초의 문헌기록인 김석익(金錫翼)탐라기년(耽羅紀年)’(1918)에는 옹중석(翁仲石)’이라 했다.

당시 민속학자들의 현지조사에서는 수호석·수문장·두릉머리·동자석·우석목(偶石木벅수머리·돌영감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졌다.

제주읍성 돌하르방은 동··3문 밖에 각 성문마다 S자형 굽은 길을 따라 4기를 1조로 해 두 군데 8기를 제작해 모두 24기를 세웠으나, 남문에 세웠던 돌하르방 8기 중 1기는 일제강점기 때 제주읍성이 헐리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 민속마을에 위치한 정의현성 3문 앞에 각각 4기씩 세워진 돌하르방 12기는 성문이 복원돼 제자리를 찾으면서 원형 보존이 가장 잘 돼있다.

돌하르방 규모는 제주읍성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다.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인성·보성리 일대에 자리한 대정현성 3문 앞에는 각각 4기씩 돌하르방 12기가 세워졌지만, 일제강점기 때부터 돌하르방 위치가 많이 옮겨져서 원형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돌하르방의 규모는 제주읍성과 정의현성의 넓이나 규모에 비해 가장 적고, 그 형태 또한 다양하게 제작됐다.

원래 대정현성은 1418(태종 18) 처음 축조할 때 제주읍성이나 정의현성과 달리 동서남북 4문을 만들었으나, 북문은 나중에 폐쇄시켜 그 후로는 3문만 남아있다.

제주읍성 돌하르방은 성문지기로서의 위용을 갖추고 있으며, 조형성 또한 육지 돌장승과 견주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연상루(延祥樓)는 제주읍성 동문으로서 현재 제주시 일도11177번지 일대이며, 처음에는 제중루(濟衆樓)라고 불렀다.

이미 1914년에 헐린 성문 앞의 S자형 옹성굽이 길목을 따라가다 보면 아직도 돌하르방 기단 같은 큰 암석이 담벼락 아래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동문 밖에 세워진 8기의 돌하르방은 1927년 이후 제주항을 건설할 때 매립재로 쓰이면서 성곽이 허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중반까지 원래의 위치에 남아 있었다.

성문 앞쪽 약 35m 지점에 세워진 아래 사진 속의 돌하르방 4기 가운데 2기는 196610월 서울 경복궁 수정전에 한국민속관(현 국립민속박물관)이 개관되면서 서울로 옮겨졌다.

나머지 2기는 용담동 옛 제주대학으로 옮겼다가 1980년 제주대학교 아라캠퍼스가 신축돼 제주대학교 정문으로 옮겨졌으며, 최근에는 제주대박물관 앞으로 옮겨 세웠다.

특히 이곳의 4기 돌하르방 기단석에는 ,, 형태의 구멍이 파여 있는데, 모두 정낭을 꽂아 넣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성문과 가까운 쪽에 세운 2쌍 돌하르방의 기단석을 뚫어서 2개의 야트막한 정낭을 걸쳐 놓은 이유는 사람의 통행금지 목적보다는 성곽을 보호하기 위해 우마차 출입을 막으려는 의도가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들보다 약 50m 더 떨어진 동문 밖의 바깥쪽 옹성굽이에 있던 4기 돌하르방은 1966년 제주민속박물관으로 2기가 옮겨졌고, 나머지 2기는 당시 도청(현 제주시청)으로 옮겼다.

이후에 제주민속박물관에 있던 돌하르방은 다시 제주KBS방송국으로 이설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직접 마차를 이끌고서 돌하르방을 옮겼던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의 전언에 따르면 4기 모두 기단석을 함께 옮기지 못해서 지금 것은 나중에 다시 만들어졌다고 한다.

진서루(鎭西樓)가 서있던 서문 밖 돌하르방은 위치 이동이 뚜렷하지 않다.

민속학자 현용준의 1963년 조사에서 당시 서문로 한일상회 앞 골목이 S자형 소로의 자취가 남아있다고 전할 뿐이다.

하지만 각 성문의 앞길에 두 굽이마다 석상 2조씩 8기를 세웠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진서루가 세워진 서문지는 제주시 삼도2847-1번지 일대로서 처음에는 백호루(白虎樓)라고 불렀으며, 동문과 마찬가지로 1914년에 불행하게 헐리고 말았다.

현재 제주시청에서 제주시 삼도21074-1번지에다 서문지의 유적 표지판을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의 지적도(1913·1940) 1932년 제작된 제주성내 식수지역도에 나타난 제주읍성 도면을 보면 위치선정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 서문 밖 돌하르방 8기는 일제 말기에 4기가 이곳에서 가까운 관덕정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4기는 현 동문로터리 근처인 옛 삼천서당과 명승호텔 앞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들 4기 돌하르방 가운데 삼천서당의 2기는 제주시 용담동에 있던 제주대학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명승호텔 앞 2기는 1963년 고춘호씨가 삼성사재단에 기증해 삼성혈 건시문 앞에 세워져 전해오고 있다.

정원루(定遠樓)가 세워져 있던 남문지는 제주시 이도11494-1번지 일대로서, 남문로터리가 크게 들어서면서 성문 앞의 옹성굽이 길목은 거의 흔적이 사라졌다.

남문 밖 돌하르방의 경우도 위치 이동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1954년 담수계(淡水契)가 펴낸 증보탐라지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남문 밖 8기 돌하르방 가운데 4기는 삼성혈 입구 및 관덕정 앞으로 2기씩 옮겨졌으며, 옛 제주여고(현 제주KAL호텔)에 있던 2기는 제주공항으로 이설했다가 최근 제주목관아 경내로 다시 옮겨졌다.

관덕정 앞 2기는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입구로 또 옮겨졌다.

1963년 조사 당시 허리가 부러진 채 유일하게 원래 자리에 남아있던 1기는 탐라목석원을 거쳐 현재 제주돌문화공원으로 옮겨졌다.

마지막 1기는 분실돼 지금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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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룡 2019-07-18 14:09:27
장인식(張寅植) 제주목사의 1848년 3월부터 1850년 6월 사이에 편찬한 『탐라지(耽羅誌)』(일본 동경대 소장본) 「선생록(先生錄)」에는 김몽규(金夢煃) 제주목사가 ‘짝의 형상을 한 돌하르방[偶形石]을 성문 밖에 새로 세웠다(壬申十一月到 新說偶形石於城門外)’이라는 내용이 최초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김석익(金錫翼)의 1918년에 발간한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옹중석(翁仲石)’이라는 기록이 최초의 문헌 기록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