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원도심의 심장…최초의 읍사무소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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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고을·병담길(4)옛 제주시청 일대
조선시대 군용창고 있던 ‘사창터’
일제시대 때 제주면사무소 설치돼
1955년 시로 승격하며 청사 건립
최초 시멘트 벽돌조 건축물로 주목
옛 제주면사무소 모습. 향리들이 근무했던 기와집 건물은 제주면사무소로 이용됐다.
옛 제주면사무소 모습. 향리들이 근무했던 기와집 건물은 제주면사무소로 이용됐다.

사창(司倉)과 제주 최초의 읍사무소·시청이 들어섰던 공공주차장

관덕정 인근 공공주차장은 옛 제주시청이 들어섰던 곳이다. 이곳은 역사·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목관아의 사창이 있었고, 제주읍의 읍사무소가 있었고, 최초의 제주시청이 들어섰던 곳이다.

아래에 그 변화과정을 소개한다.

향리(鄕吏)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지방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이다. 향리의 집무청인 사()는 모든 지방에 관리가 파견되지 않았던 고려시대부터 설치됐다. 향리들은 사()에 모여 그 지역의 일을 논의했다.

향리는 행정사무를 담당하는 중간 관리층으로 실제적인 사무는 이들의 손에서 처리됐다. 예부터 향리들을 담당하는 주사는 지금의 삼도 2동 관덕정 서쪽에 있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주사는 관아에서 거둬들인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로 변화했다.

고려시대 대촌현이라 불리던 제주시 원도심 일대는 조선시대에서는 제주목 중면의 소재지였다. 1416(태종16) 제주시는 제주목으로 출발했으며, 1608(광해1) 제주판관 김치에 의해 처음으로 도내의 방리(坊里)를 설정한 이때부터 제주시는 제주목의 3(좌면·중면·우면) 가운데 중심부에 있다해 중면이 된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제주면으로 개칭되며, 일제강점기인 1935년 제주읍으로 승격해 초대읍장에 홍종시가 취임했다. 이곳 한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숨어있는 사창터의 표지석 내용과 탐라·고을·병담길 주요 역사문화 내용을 아래에 옮긴다.

사창(司倉)=조선시대에서 사창(司倉) 진휼창(賑恤倉) 등 주로 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사창의 창설연대는 알 수 없고 처음에는 호남 원병(援兵)의 양곡을 저장 관리했으나 1620(광해 12)에 혁파 이관하고 그 뒤로는 고을의 환곡 반료(頒料) 등을 저장했다.

또한 미곡을 상평창(常平倉)과 군자창(軍資倉)으로 옮겨 각종 급료(給料)의 밑천으로 삼았다. 판관(判官)이 주관했다.

1668(현종 9)에는 사창 옆에 따로 진휼고를 설치, 양곡을 비치해 흉년에 대비했다. 일제 때는 이곳에 제주면사무소가 설치돼 읍으로 승격하고 한동안 제주시청 자리가 됐다.

 

제주읍이 1955년 시로 승격, 이에 건축가 박진후에게 설계를 의뢰해 1959년 완공된 옛 제주시 청사.
제주읍이 1955년 시로 승격, 이에 건축가 박진후에게 설계를 의뢰해 1959년 완공된 옛 제주시 청사.

제주면사무소=조선시대 목사가 다스렸던 제주목(濟州牧)1906년 목사를 폐지, 군수를 두면서 제주군(濟州郡)으로 바뀌었다. 당시 제주군 중면(中面)이 오늘날 제주시지역이다. 1913년 중면은 제주면으로 개칭됐다.

기와집이던 주사 건물은 제주면사무소로 이용됐다. 이에 따라 제주시 청사의 효시는 향리들이 근무했던 주사 건물에서 시작됐다.

일제는 1931년 기와집이던 제주면사무소를 허물고 서양식 청사를 신축해 제주읍사무소를 설치했다.

주사 건물에 들어섰던 면사무소는 제주읍으로 승격되던 1931년까지 18년 동안 사용됐다. 195591일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면서 주사 건물이 있던 자리는 또 다른 신축 청사가 들어섰다.

옛 제주시 청사=제주읍은 195591일 시로 승격했다. 이에 건축가 박진후에게 설계를 의뢰해 19591010일에 완공한다.

옛 제주시 청사에 대해 주목할 만한 점은 제주 최초의 시멘트 벽돌조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옛 제주시 청사는 중앙에 출입구를 두고 좌우 대칭 형식을 갖춘 근대 건축물이었다.

이 건물은 민간에게 불하된 뒤 오랜 기간 상업공간으로 사용되다가 관리의 어려움으로 201212월 철거됐고, 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문사거리 방면에서 남쪽으로 골목을 돌면 성문을 형성하는 나무 기둥이 놓여있던 주춧돌이 남아있다.
서문사거리 방면에서 남쪽으로 골목을 돌면 성문을 형성하는 나무 기둥이 놓여있던 주춧돌이 남아있다.

제주성 서문인 진서루(鎭西樓) 위치는 어디일까?

진서루는 제주성문 중 서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헐려서 지금은 표석만 남아있다. 서문사거리 방면에서 남쪽으로 골목을 돌면, 성문을 형성하는 나무 기둥이 놓여있던 주춧돌이 남아있다.

서문에는 백호루(白虎樓)라고 불리는 서문루가 있었다. 백호는 동서남북 방위 중 서쪽을 수호하는 방위신이다. 서문루가 언제 창건되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1739(영조15)에 제주목사 조동점이 중수하고, 1773(영조49) 목사 박성협이 다시 중수한 뒤 백호루를 진서루(鎭西樓)라 해 친필로 편액을 바꾸었다.

제주읍성의 다른 성문처럼 이곳을 지키던 성문은 사라졌다. 하지만 서문 자리임을 확인할 수 있는 주춧돌이 일부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곳 일대가 옹성이 설치됐던 곳임을 추정할 수 있다. 진서루 옆으로 난 동쪽 길은 예전에는 제주성이 놓였던 자리다. 1915년 전후 읍성철폐령에 의해 일제가 성담을 헐어 낸 소롯길은 이제는 2차선으로 넓혀져 예전 성담 흔적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곳 주민들의 증언과 골목 형태 등의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지금의 진서루의 표지석이 놓여있는 곳보다 남쪽인, 성내교회 근방으로 여겨진다.

현 관덕로, 김판규외과 맞은편에 서문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이 일대를 서문한질이라고 한다. 관리기관에서는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좀 더 정확한 진서루의 위치를 찾아 그곳에 지금의 표지석을 설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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