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뜨는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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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일 수필가

무더위 쉼터에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시원한 콩국수와 수박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무더위가 극성을 부린 올 여름, 이 힐링의 공간은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지난 봄, 아파트의 연륜과 함께 하여 후줄근해진 경로당 시설을 리모델링하자 주민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12월 초, 부녀회가 준비한 어려운 이웃돕기 우리 농산물 바자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파트 마당에 아침 일찍 천막을 치고, 늘어놓은 가판대에 물품을 차곡차곡 진열하는 회원들의 손놀림이 꽤 분주했다. 9월 초부터 제주 중산간 마을을 찾아 발품을 판 덕에, 윤기 흐르는 노란 참깨도 구입하여 짠 고소한 참기름 병도 진열하였다.

바자회는 17년째, 이 아파트의 연륜과 함께하고 있다. 꼼꼼히 살피지 않으면 어느 새 근본을 알 수 없는 외국산 먹거리가 밥상을 차지해 버리고 있다. 우리의 토양에서 비와 바람, 햇볕을 받아가며 농부들의 순하고 질박한 손으로 키워낸 믿을 수 있는 농산물로 식구들의 건강을 챙기고 싶은 부녀회원들이다. 심사숙고한 우리 농산물들은 서너 시간이면 동이 나 버리곤 했다.

바자회 수익금은 그동안 꾸준히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소아암재단에 작은 금액이지만 성금을 내고 있다. 나눔의 보람으로 회원들은 즐겁게 바자회에 참여하고 있다.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부대끼다 보면 갈등도 드러나곤 한다. 소소한 갈등들은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풀기도 했고, 아파트 어르신들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하며 정을 나눌 때는 함께하는 모두의 마음들이 뜨뜻해졌다.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어느 봄날, 부녀회원 10명이 23일간 일본 동경과 시즈오카를 찾았다. 해마다 한번 씩 챙겼던 도내 나들이, 두어 번 국내 여행의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른다는 회원들. 미지의 세상을 가슴에 품고 홀가분하게 맛있는 음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메마른 일상에서 얻는 작지 않은 선물인 듯, 삶의 무게에 움추렸던 그늘은 온데간데없다. 마치 소녀들처럼 해맑고 풋풋하게 보였다.

어둠이 내리면 아파트 옆 근린공원을 걷는다. 한 두 사람 걷다보면 어느새 한 소대의 여군들이 걷고 있다. 아이들처럼 재잘대며 웃다보면 혼자라면 지루할 한 시간이 후딱 지나고, 운동기구에서 몸속 구석구석 세포들을 깨운다. 하루 종일 애써준 몸을 어루만지는 공원 정자에서의 휴식은 달콤하다. 벗들은 세상근심 내려놓은 선녀인 듯 편안해 보였다.

요즘 갈치가 많이 싸졌대. 사서 나눌까?”

누군가의 제안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새벽 부두로 달려간 여인들은 살아 움직이듯 싱싱한 수산물에 눈들이 커진다. 큰 호박은 잘라 나누고, 키운 화분이 수가 늘어 분양한다는 사진이 카톡방에 올라온다.

아파트 빈터에 심어놓은 봉숭아꽃이 예쁘게 피어나면 사랑방에 모여 서로의 손을 내밀어 손톱에 예쁜 봉숭아물 들이고, 손자의 백일 떡을 돌린다. 자랑할 일이 생기면 한 턱을 쏜다고 짱구분식으로 초대하다보니, 자연스레 짱구모임이 탄생했다. 가끔 근처의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 잔을 마주하고, 노래방에서 한 곡 뽑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구수하게 뜸 드는 밥 냄새 같은 이 여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여생 참 허허로웠을 것이다.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도 일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한 가장 위대한 지혜는 우정이라고 가르쳤다.

둥지를 떠난 자식들, 멀리 있는 벗들은 만나고 싶어도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이곳에선 만나고 헤어짐에 벽이 없다. 이사 갈 생각들이 전혀 없다니. 퇴직하면서 남편과 전원주택을 쭉 둘러보다 포기한 일은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우리는 도시 아파트의 폐쇄된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것들을 챙기며 살아가느라 서로 바라보는 눈빛들이 따뜻하다. 사실 관리가 편하고 독립적인 공간인 아파트는 편안한 삶의 터전인 듯하다.

방금 블루베리 주스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콩 한쪽 나누어 먹는 넉넉한 인심이 시골 아낙들만의 전유물은 아닌 듯하다. 아마 오늘 저녁도 쭈욱 땀 흘린 후, 정자에 둘러앉아 상큼한 주스 한잔 마시면, 여인들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이 눈 속으로 들어와 별들과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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