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소년, 성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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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서귀포시 성산포편
바람의 길목이면서 오늘도 싱싱한 태양이 떠오르는 곳
상처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4·3의 아픈 기억도 있어
바람난장 문화패가 서귀포시 성산읍을 찾았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이곳은 4·3의 아픔이 있는 장소다.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섬에 찾아온 가을을 만끽한다. 유창훈 作, 성산일출봉.
바람난장 문화패가 서귀포시 성산읍을 찾았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이곳은 4·3의 아픔이 있는 장소다.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섬에 찾아온 가을을 만끽한다. 유창훈 作, 성산일출봉.

바람 그리고 영원한 소년, 성산포

성산포에 한 소년이 살았다. 소년은 바닷가 바위틈에서 보말과 고동을 줍기도 하고, 작은 게나 모래 밑에 숨은 조개를 캐기도 했다. 가끔은 물꾸럭(문어)을 건져 올리기도 하고, 작살로 어렝이(놀래기 종류)와 볼락을 잡을 때도 있었다. 바다에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기도 하고, 어머니를 따라 밭일을 나가기도 했다. 소년은 바다에 살았고, 오름을 사랑했고, 저녁마다 붉게 물드는 노을을 미치도록 바라보았다. 소년은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자연은 시인에게 말을 거는 가장 훌륭한 뮤즈였다. 여기서 소년은 아침마다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며 저녁이면 주변에 모든 사물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이다.

 

포근하면서 우수에 찬 목소리 연극인 정민자가 강중훈 시인의 '섬의 우수'를 낭송한다.
포근하면서 우수에 찬 목소리 연극인 정민자가 강중훈 시인의 '섬의 우수'를 낭송한다.

섬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무진장 쏟아지는가을 햇살이 섬의 분위기를 바꾼다. 포근하면서 우수에 찬 목소리 연극인 정민자님이 강중훈 시인의 섬의 우수를 낭송한다.

여기, 가을 햇살이/칠십 해를 훨씬 넘긴 지난 일들을 기억하는 그 햇살이/그때 핏덩이 던/여든이 다된 할아비의 주름진 앞이마와/수수깡 같은 노파의 잔등위로/무진장 쏟아지네//거북이 등짝 같은 눈을 가진 무리들이 바라보네//‘성산포 앞바르터진목’/바다물살/파랗게 질려/아직도 파들파들 파들파들 떨고 있는데//순비기나무 줄기 끝에/철지난 꽃잎 몇 조각/핏빛 태양 속으로 목숨 걸 듯/숨어드는데/섬의 우수 들불처럼 번지는데//뉘 혼백인양 성산포 4·3희생자위령제단 위로/바다갈매기 하얗게 사라지네

- 강중훈, ‘섬의 우수憂愁전문.

기억은 어느 날 갑자기 몰려오는 태풍이다. 태풍 13호 링링이 막 제주를 빠져나간 주말. 성산포 광치기 해변에 몰아쳤던 4·3의 상처가 바람을 헤집는다. 오래오래 가슴에 담고도 모자라 영혼까지 적시는 곳. 인간이 한낱 자연의 일부라는 말이 온몸으로 부서진다. 자연은 시간으로 공간의 뼈대를 세우고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오요욕을 몸에 새긴 또 하나의 우주이며 상징이다. 과거에서 온 현재이며 현재에서 미래를 예지하는 예언가이기도 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하는 것. 순리는 이치에 따른다는 뜻이다. 순리에 따르지 않을 때 슬픔은 이미 예견된 결과다.

 

무용가 장은님의 살풀이가 상처 난 영혼을 가만히 달래고 어루만진다. 상처와 고통이 아물기까지의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우리는 다만, 그 바람이 다 지나가기를 고요히 기다릴 뿐이다.
무용가 장은님의 살풀이가 상처 난 영혼을 가만히 달래고 어루만진다. 상처와 고통이 아물기까지의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우리는 다만, 그 바람이 다 지나가기를 고요히 기다릴 뿐이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무용가 장은님의 살풀이가 상처 난 영혼을 가만히 달래고 어루만진다. 상처와 고통이 아물기까지의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우리는 다만, 그 바람이 다 지나가기를 고요히 기다릴 뿐이다. 하얀 나비가 되어 천상으로 훨훨 날아가기까지.

사람들이 성산포의 매력에 빠지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바람이 들려주는 수많은 이야기가 그 매력이 아닐까. 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르 끌레지오 역시 성산포와 제주의 매력에 푹 빠진 소설가다. 시낭송가 이정아, 장순자님이 유럽 최대 잡지에 소개된 르 끌레지오의 산문을 들려준다.

오늘날 제주에는 달콤함과 떫음,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있다. 초록과 검정, 섬의 우수를 우리는 동쪽 끝 성산포 일출봉에서 느낄 수 있다. 제주 4·3이 있던 그해 925일 아침, 일출봉해변에서 군인들이 성산포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해 트럭에서 내리게 했을 때 그들이 마주= 일출봉바위, 나는 그들이 그 순간에 느꼈을, 그들에게 그토록 친숙한, 새벽바위 일출봉을 향한 눈길의 의미를 상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공산진영과 자유세계가 맞선 냉전의 가장 삭막한 한 대목이 펼쳐진 곳이 여기, 일출봉 앞인 것이다. 모든 것은 제주에서 군대와 경찰에 의해 양민이 학살당한 진부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신 모래에서 논다. 숙청 때 아버지와 삼촌을 잃은 시인 강중훈씨조차 시간의 흐름에 굴복했다. 그가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시 한편 한편이 그해 925일의 끔직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걸 뛰어넘을 필요성도 알고 있다“ (2008년 유럽의 최대잡지 “GEO” 창간 30주년 기념특집에 실린 J.M.G 르 끌레지오의 제주기행문 중에서)

 

이정아·장순자 시낭송가가 유럽 잡지에 소개된 르 끌레지오의 산문을 들려준다. 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르 끌레지오는 서귀포시 성산읍을 방문해 이곳에 매력에 흠뻑 빠졌다.
이정아·장순자 시낭송가가 유럽 잡지에 소개된 르 끌레지오의 산문을 들려준다. 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르 끌레지오는 서귀포시 성산읍을 방문해 이곳에 매력에 흠뻑 빠졌다.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엔 아픔이 많다. 갑자기 휘몰아치며 모든 것을 다 앗아갈 것처럼 화를 내기도 하다가, 또 어떤 날은 순한 미소로 부드럽게 뺨에 닿는다. 자연은 기억으로 점철된 물질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렇게 자연으로 스며드는 이유다.

어느 날 바람이 혼자 바닷가에서 웅웅 짐승처럼 울고 있다. 성악가 윤경희님이 들려주는 섬집 아기봉숭아는 그렇게 오래오래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 그리움의 전부를 노래한다. 성산포 앞바다는 오래오래 몸을 뒤척인다.

민족의 정서와 한을 노래한 시인 김소월. 그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성악가 황경수님의 감성으로 애잔함을 불러온다. 우리의 바람, 희망 혹은 소망은 무엇일까. 온전히 가족이라는 이름이 존재하기를 바랐던 시절.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 주오지금도 그 기다림의 바람은 유효하다. 윤경희, 황경수님이 함께 부른 등대지기가 비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도록 그 기다림을 대신한다.

 

윤경희 성악가와 황경수 제주대 교수가 '등대지기'를 함께 부른다. 비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도록 기다림을 대신한다는 노랫말처럼 바람의 길목에 선 성산포는 아직도 상처 난 영혼을 달래고 어루만지며 냉전의 대목이 펼쳐졌던 이곳이 평화로 가득하기를 기다리는지 모른다.
윤경희 성악가와 황경수 제주대 교수가 '등대지기'를 함께 부른다. 비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도록 기다림을 대신한다는 노랫말처럼 바람의 길목에 선 성산포는 아직도 상처 난 영혼을 달래고 어루만지며 냉전의 대목이 펼쳐졌던 이곳이 평화로 가득하기를 기다리는지 모른다.

바람의 길목, 성산포. 우리가 걸어야 할 바람은 아직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소년, 오늘도 싱싱한 태양이 일출봉 위로 떠오른다.

사회=김정희
그림=유창훈
시낭송=정민자 시놀이(이정아, 장순자)
무용=장은
성악=윤경희 황경수
음향=최현철 고한국
반주=김정숙
영상=김성수
사진=허영숙
=김효선
후원=제주특별자치도, 제주, ()제주메세나협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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