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덜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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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현 수필가

추분 지나 달포여. 절기의 흐름이 어찌나 정직한지 요 며칠 새, 아침저녁 기온이 확 꺾였다. 거리를 걷는 이들 옷의 색감도 가을과 닮았다. 계절이 오가는 길목.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옷장 앞에 서는 시간이 가장 길 때가 요즘이 아닌가 한다. 밤낮의 기온 차로 이것저것 꺼내 입고 벗다 보니 방안도 날씨만큼이나 혼란스럽다.

살림이란 것이 정리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아예 손길이 닿지도 않았던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인가. 어느 한 해 게으름 피우거나, 할 일을 미룬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늘 손을 필요로 하니 말이다. 집안 이것저것을 정리하다 마침 아들 손을 빌려야 할 때였다. “이것은… 엄마 씁니까?”하고 가리킨다. 공연히 한 소리 할까 봐 눈치 보여 ‘응’하고 대답했다. 일 년에 몇 번이나 쓰는지를 재차 물어 왔다. 두어 번이라고 들려도 되고, 아니면 더 좋은 크기로 대답하고는 말을 아꼈다.

사실 그것을 써 본 적이 없다. 아니 아예 쓸 줄을 모른다. 그렇다고 필요한 사람에게 주거나, 내다 버리지는 더더욱 못하겠다. 이 무슨 억지인지 스스로도 설명이 안 될 뿐이다. 굳이 이유를 댄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정도다. 쓸 줄을 모르니 쓰는 것을 본 적 없는 아들 눈으로 본다면 무용지물이 맞다. 장식품도 아니고 세월에 색은 칙칙하고 바래어, 공연히 자리만 차지하니 그 마음 충분히 이해된다.

반세기 지나 아득한 시간 위로 기억 한 자락 거두지 못함이 애착에 한 겹을 덧댄 셈이다. 모든 물자가 귀하던 시절, 손재봉틀을 처음 갖게 된 어머니는 무척 좋아하셨다. 새것도 아니고 외지인이 짐이 많아 싸게 처분하겠다는 말이 어머니 귀에 닿아 장만하게 되었다. 하도 좋아 어머니께선 그걸 아예 끼고 사셨다. 심지어 ‘지지빠이가 소소한 것은 제 손으로 기워 입기도 해야 된다.’고 반복하며 배우라는 것을, 반항하듯 거부했던 것이 이즈음에서 후회될 줄이야 낸들 알았을까.

어느 하루, 당신 통치마 헌 쪽을 잘라낸 뒤, 작게 내 치마를 만들어 주셨다. 온통 자잘한 국화꽃 가득이던 치마가 어찌나 곱던지, 치마를 펼쳐 앉고 국화꽃을 세다가 잠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효용가치만 본다면 세탁소에 얼마만 주면 훨씬 깔끔히 만들어 낸다.

가끔 기억한다는 것은 참 두렵다는 생각이 든다. 소소한 물건에 내재된 그때의 느낌과 정서를 털어내지 못함으로, 이런 것을 몇 십 년씩 껴안고 살아가니 말이다. 필요성과 쓰임으로만 말하면 열 번을 버려도 될 일이다.

그래도 ‘어머니!’ 하고 불러보면 손때에 절어 달달거리는 소리 앞에 앉아,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쳤다가 한 손으로 안경코를 올리며 바라보던 기억 속 그윽한 눈빛. 그런 아련함이 녹아들어 오롯이 그런 것을 간직하고픈 마음, 그것 때문인 게다. 따뜻하게 스며든 기억 하나에 입가론 웃음 가득인데, 눈에선 시간으로 감정을 누벼 재봉질 해 두었던지, 오래 된 추억 하나가 펄럭이며 이내 눈물로 샌다.

담아 둔 감정을 이제 서서히 꺼내는 연습이 필요할 때인가 보다. 다음 어느 기회에 아들이 한 번 더 묻는다면, 기꺼이 그러자고 대답하는 연습을 해 둘 생각이다. 내 안 추억의 곳간에 담아 두기만, 담는 연습만 열심히 했었다. 더 늦기 전에 서서히 덜어내고 또 정리하는 작업을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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