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이후 도민 집단기억 억눌러…학교의 4·3교육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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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현기영 소설가
4·3 발생 30년 뒤인 1978년 ‘순이삼촌’ 발표…고난·역경 겪어
생존 피해자들 직접 취재…“공권력이 도민 기억 오랫동안 말살”
“남북·북미 간 갈등 해소 위해 제주서 4·3 평화 기억 운동 필요”
현기영 소설가가 지난 18일 제주웰컴센터에서 열린 제주人 아카데미에서 ‘제주4·3과 기억 투쟁’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고봉수 기자 chkbs9898@jejunews.com
현기영 소설가가 지난 18일 제주웰컴센터에서 열린 제주人 아카데미에서 ‘제주4·3과 기억 투쟁’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고봉수 기자 chkbs9898@jejunews.com

현기영 소설가(78)는 지난 18일 제주웰컴센터에서 제주보 주최로 열린 제주아카데미 세 번째 강좌에서 제주4·3과 기억 투쟁을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4·3이 발생한 배경을 설명했다.

 

4·3은 왜 일어났나?=4·3의 발생 배경에 대해 그는 제주의 해방공간(1946~1948)에서 3년간 격동기를 맞이했다고 했다. 광복으로 6만명이 넘는 제주 청년들이 일본에서 귀환한 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주역이 됐다. 그러나 66일간의 가뭄으로 대흉년이 찾아왔고, 콜레라가 만연해 도민 400여 명이 죽었다.

일제시대 민족을 억압한 친일파가 재 등용되면서 민중은 분노했다. 1947년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만 단독 정부를 세우기로 했다. 그해 3·1절 기념식에서 단독 정부 수립 반대시위가 열린 가운데 6명이 죽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1947310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은 육지 경찰인 충남부대와 철도경찰대에 이어 서북청년단을 제주에 보냈다. 파업 주도세력 2500여 명이 체포됐고, 3명은 고문치사를 당했다.

이에 대해 그는 굶주린 야수를 양떼에 풀어 놓았다고 비유했다.

그는 서북청년단은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도민을 고문했다. 정복자나 다름없었다내 부모와 아내가 당하면서 젊은이들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제주도 백성들이 죄가 있다면 분단을 반대했고, 통일 정부를 적극적으로 외친 것 밖에 없었다. 이는 민족주의다. 1948년의 4·3은 이데올로기 깃발을 날린 게 아니라 강요된 저항이었다. 4·3봉기 때 슬로건은 탄압하면 항쟁한다였다고 강조했다.

소설 순이삼촌을 쓰게 된 이유=그는 “4·3이 발생한지 30년 뒤인 1978년에 쓴 작품으로 곤경과 역경에도 순이삼촌은 살아남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내 고향인 노형동에서 600여 명이 희생돼 피해가 컸지만 북촌리는 한날한시에 400여 명이 희생됐다. 극중 무대는 북촌리이지만 내 고향 노형동의 경험도 있었다“4·3은 삶의 궤적으로 드러나야 했지만 30년 동안 도민의 집단 기억은 억눌리고 말살 당했다고 말했다.

현 소설가는 북촌리에 여러 날을 취재 갔지만 할머니들은 말도 없이 내 손만 잡고 울기만 했다. 그분들은 얘기를 하면 경찰에 알려지면서 잡혀갈까봐 걱정했다. 4·3의 비참함과 가족들이 당한 얘기를 하면 자식과 손자들까지 불행해질까봐 말을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울기만 하는 생존 피해자들에게 그는 젊은 작가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면 저승에 가서 희생된 가족을 만날 때 무슨 낯으로 뵐 수 있느냐. 어르고 달래면서 겨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의 시간은 1948년 겨울에 머물러 있었죠. 집단 기억이 있었지만 발설을 못한 것이죠. 공권력이 도민들의 기억을 말살시켰습니다. 살아남은 자는 기억이 두려워 잊어버리려 했죠. 4·3은 오랫동안 억압된 채로 기억을 타살시켰습니다.”

4·3을 기억하자=강연에 이은 질의응답 시간에서 참석자들은 연좌제로 사관학교는 물론 공무원 채용에서도 떨어진 사연을 소개했다. 한 참석자는 어릴 적 어머니가 ‘4·3은 지긋지긋 했다. 그런 세상이 다시 오면 차라리 극단적 선택을 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며 사연을 꺼냈다.

답변에 나선 현기영 소설가는 “4·3이 끝나도 연좌제는 진행 중이다. 4·3특별법이 해결안 된 것도 4·3이 해결되지 않고 진행 중인 것을 잘 알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4·3은 너무 중요하다. 도민과 국민들이 잘 알아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4·3보다 더 무서운 것은 4·3을 잊고 망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4·3의 진실을 알려야 하지만 부정하고 왜곡하는 세력이 여전히 있다. 후대들을 위해 학교에서 4·3을 교육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4·3의 평화와 인권으로 승화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4·3은 미국이 관여한 국제적인 사건이라고 밝혔다. 그는 남북과 북미 간 전쟁과 갈등을 해소하려면 정상들이 평화의 섬 제주에서 4·3의 가치인 평화와 인권에 대한 기억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 소설가는 “4·3은 무겁고 처참하고 슬프다. 그러나 요즘 사회는 경쾌하고 엔터테인먼트를 좇는 시대여서 너무 슬프면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국민적 여론을 얻으려면 4·3에 대한 기억 운동, 즉 기억 투쟁을 잘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1941년 제주시 노형동에서 출생한 현기영 소설가는 7살 때 4·3을 겪었다. 1978년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했고, 1983년 이재수의 난을 소재로 변방에 우짖는 새를 출간했다. 200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에 이어 2003년 제11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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