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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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희 수필가

고요한 아침. 정목 스님이 부르는 노래 바람 부는 산사를 듣는다.

아무것도 없는 종이 위에 산을 그려도 바람은 그릴 수 없어

여승의 청아한 노랫소리가 내 영혼을 일깨운다.

벽을 향하여 참선하는 임의 모습 그려도 마음은 그릴 수 없네

산사의 바람 소리를 듣고 싶어 집을 나선다. 산사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천왕사는 한라산 정기가 듬뿍 서려 있는 아흔아홉 골 중에 가장 신비로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며 올라가는 길목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알프스 풍경이 연상되곤 한다.

산사로 들어가는 숲길에는 측백나무가 울울창창하다. 연등은 측백나무에 기대어 두 줄로 나란히 서서 기다렸다는 듯 반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새소리, 시냇물 소리, 나뭇잎에 부는 바람 소리가 청아하다.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걷노라면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대웅전 처마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댕그랑 댕강 딩고랑 동강. 톡톡톡 탁탁. 스님의 목탁 소리와 어우러진 화음은 산사의 운치를 더한다.

삼성각 높은 계단을 올라가 촛불과 향을 피우고 삼배를 올린다. 이곳과 인연을 맺은 지도 삼십여 년이 지났다. 산신 할아버지는 언제나 변함없이 반긴다.

염려 말아라. 기도하는 네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끄덕끄덕하면서 인자한 미소를 짓는 듯하다. 스님의 염불 소리. “산왕대신, 산왕대신.” 영험한 기운이 감돈다.

오직 존재하기 위해 피어난 들꽃을 보세요. 제자리에서 가만히 피어나도 고운 모습과 향기는 바라보는 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지요. 먼저 자신을 돌보고 꽃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보세요. 세상이 환해질 거예요.” 스님의 설법을 들으며 지친 심신을 가다듬는다.

여기, 산사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떠오르는 화두는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이다. 바람 기운이 생기고 마찰력에 불기운이 생기고, 불에 녹는 것이 물이 되고, 굳은 것이 흙이 된다고 한다. 소우주인 내 몸이나 우주도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흙과 물, 물과 불, 불과 바람, 바람과 흙은 서로 상생하며 둥글게 산다. 해탈하면 만 남는다고 한다. 해탈은 비우고 벗어남이다.

내 육신을 이루고 있는 흙···바람·공간·앎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요사이 내 발이 통증을 느끼게 한다. 무거운 몸을 지탱하면서 분주한 마음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구나. 고마운 발을 쓰다듬는다. 발바닥 통증의 연유는 무엇인가. 통증이 작은 깨달음을 준다. 심신의 휴식이 필요하다. 기를 보충하고 푹신한 신발을 신고 발을 아껴야 한다고 의사도 충고한다.

수긍한 나는 약 처방을 받고 푹신한 깔창이 있는 신발을 신는다. 포근한 느낌이 좋다. 발도 편안한지 통증이 가라앉는다. 사람의 숨결이나 마음결, 손길, 말씨도 부드럽고 포근한 것이 좋다. 심신이 흰 구름처럼 가벼워지니 발의 통증도 잊고 걸어본다.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바람결이 부드럽다. 단풍나무의 잎사귀를 바라보니 평온하다. 강풍이 불어올 때마다 온몸으로 견뎌낸 나무들의 모습이 의젓하다. 산사를 두르고 있는 세존 바위, 보살 바위도 따스한 미소를 짓는다. 들꽃도 향기로 반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무엇보다 좋은 관계 맺음이 중요하다. 요즘은 무조건 포용이 아니라 관계에서 때론 빼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거친 바람에 멍든 내 가슴을 보았는지 산사의 바람이 다독이며 말을 전한다. “사는 동안 전갈이나 가시나무를 만나거든 거리를 두어라.” 단순한 지혜를 마음에 담는다. 언제 어디서나 좋은 인연을 만나고 싶다. 꿈꾸던 인연이 가을바람에 실려 다가오리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최선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글귀를 늘 마음에 지니고 산다. 세월의 폭풍우를 견뎌내니 행운이 찾아와 축복의 문을 열고 있다. ‘이라는 글자를 뒤집으면 이 된다. 운이 좋아지려면 공을 들여야 한다는 뜻인가.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하늘이 도와주시리라.

지금, 여기 가파른 백육십 계단을 조심조심 밟고 올라와 삼성각에서 산사의 바람소리를 듣는 축복의 시간이다. 머무는 자리마다 믿음이고 낙원이다. 산사의 청정한 공기와 맑은 물을 마시고 나니 기운이 솟는다. “물처럼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요.”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는다.

솔바람이 우우우 잠을 깨우는 산사의 바람 소리가 들릴 뿐가사를 떠올리며 삼성각 계단을 내려온다. 마음은 바람처럼 볼 수도 잡을 수도 없지만, 바람처럼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다. 내 안의 존재자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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