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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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일에서 손을 떼는 게 퇴장이다. 현역에서 물러나는 것,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이 퇴장이다.

힘들거나 더할 능력이 없어 그만두기도 하고, 후배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물러나기도 하고, 더는 보여줄 게 없으니 내려오기도 한다. 능력 여하에 대한 판단은 자기 기준으로 결정될 것이고, 자리를 내주려면 전후 흐름이나 현재의 상황 따위에 대한 진단이 있어야 하고, 무대를 내려오는 것은 극에서 맡은 배역을 다해 더 보여줄 게 없으니 관객에게 마지막 무대 인사를 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스스로 할 수도 있거니와 규정이나 관행을 따르는 경우도 있다. 규정이나 관행을 따르는 것은 강제되는 것이니 복종하는 방식이라 하릴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하는 퇴장은 만만찮다. 여러 이유로 자리에 연연할 수 있다. ‘아직 젊다, 힘이 남았다, 더해야 목표를 이룬다. 내공이 아깝다, 경쟁력에서 앞선다.’ 근거를 내세운 타당성 있는 주장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과욕과 아집으로 꽉 차 있으면 명분도 기준이란 것도 다 흔들린다. 자기중심적인 게 에고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기적이라 소아적(小我的) 사고에 갇혀 있다. 그런 성향이 남을 배려해 선택할 여지는 거의 없다. 종을 향해 손을 벋어도 변죽을 울리는 시늉에 그칠 뿐 소리를 내지 못한다. 자신이 안 보이는데 퇴장의 길이 보일 리 있으랴. 보이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게 길이다. 오히려 길이 안 보인다고 합리화하려 사설을 늘어놓기도 한다.

내 얘기를 하게 되는데, 나는 교직에서 정년퇴임한 만년 선생이다. 44년간 몸담았다. 오랜 세월을 재직했으면서도 퇴임 날에 울컥했다. ‘왜 나를 내려오라 하느냐. 하던 일이 남아 있는데 그리고 나는 더할 수 있는데, 남은 힘이 이렇게 있는데….’ 주먹을 불끈 쥐니 팔뚝이 불뚝거렸다. 파르르 근육이 분노했다.

자연인으로 돌아온 나는 흐르는 시간 속에 일을 찾게 됐다. 그 무렵, 하던 것을 더 치열하게 하자 한 게 글쓰기다. 그새 좀 쓴 편이다. 퇴임할 때 파르르 떨던 근육의 분노를 삭일 유일한 방책으로 쓰게 된 것이다. 사유가 깊을수록 안에 잠재한 격했던 감정이 눈 슬 듯 녹아내리는 것을 몸의 구체적 반응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문학적 성과 이전에, 그래서 이만큼 무탈한 데다 수를 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른다.

퇴장은 어려운 것. 더욱이 중도 퇴장은 지난하다. 선택지로서 퇴장이란 말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하고 싶기도 하려니와 이제까지 자신의 둘레를 비춰온 현란한 빛과의 결별이 죽기보다 싫은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덜미 잡히는 게 현재라는 무대로부터 내려옴이다.

정가의 우스갯소리 하나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인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다.” 그럴싸한 풍자다. 정치인이 국회의원직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빗댐이다. 그들은 공천 못 받으면 낙천, 선거에서 표를 못 얻어 떨어지면 낙선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낙천과 낙선은 퇴장이다. 퇴장당하는 것이다.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않고 정의만을 말하고 행동하겠다는 초심을 잃었다.” 잘 나가던 여당 국회의원이 몇 달 뒤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50 중반에 미치지 않은 젊은 나이인데 쉽지 않은 선택이다. 불출마의 변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런 퇴장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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