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폭발로 공포 휩싸인 탐라민들 마음 달래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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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정 종점 제주시 건입동 동자복…제주도 민속자료 1호 지정 
복을 빌기 위해 세운 미륵불…서자복과 함께 각 행정단위에 설치
고려조정 도움 받아 1011~1012년 무렵 탄생·제주불교 시작 추정
제주시 건입동 만수사 터에 있는 동자복 미륵불의 모습. 용담1동 용화사에 있는 서자복 미륵상과 함께 1971년 제주도 민속자료 1호로 지정됐다.
제주시 건입동 만수사 터에 있는 동자복 미륵불의 모습. 용담1동 용화사에 있는 서자복 미륵상과 함께 1971년 제주도 민속자료 1호로 지정됐다.

제주성 밖에는 돌하르방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동미륵상과 서미륵상이 세워져 있다. 두 개의 석상은 각각 남성과 여성의 모습을 형상화 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미륵상이 세워져 있는 곳에는 시기를 알수 없는 만수사(萬壽寺)라는 절이 있었다. 서미륵상은 지금 용담동 서한두기 용화사라는 절의 경내에 있는데, 이곳에도 창설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해륜사(海輪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만수사와 해륜사는 자복사로 통칭된다. 자복사는 국가에 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절을 말한다.

이번 질토래비 역사기행은 동성·돌하르방길을 지나 만수사와 해륜사 등 고려시대 각 행정단위의 치소까지 설치됐던 자복사를 들여다본다.

 

동자복·서자복에 숨겨진 탐라사의 비밀

동성·돌하르방 길은 일단 동자복 공원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동자복 공원의 역사 역시 동성의 역사처럼 드러내야 할 수 많은 이야기들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동자복 석상은 돌하르방의 조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 민속자료 1호는 동자복과 서자복이고 2호는 돌하르방이다.

동자복과 서자복이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된 것은, 돌하르방보다 먼저 제작되고 그 가치가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동자복·서자복은 언제 제작되었을까?

예부터 제주성 밖 동쪽과 서쪽에는 두 개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이 석상은 복신미륵(福神彌勒), 자복미륵(資福彌勒), 미륵, 돌미륵, 미륵부처, 미륵보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지고 있다. 동복신미륵은 오랫동안 개인주택 뒤뜰에 방치되듯 있었다.

2010년 께 제주시에서 이 주택을 매입한 뒤 철거해 경내를 정리함으로써 동자복은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서자복은 아직도 제주시 용담동 속칭 동한두기의 용화사 사찰 경내에 있다).

동미륵상은 키가 3m 정도로 풍채가 우람한 데 비해 서미륵상은 2m쯤 되어 보인다. 외형적으로도 동자복은 남성, 서자복은 여성을 나타낸다고 알려져 있다.

두 개의 복신미륵상은 제주도 민속자료 제1호로 1971년 지정되었다. 하지만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는 지에 관한 확실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차양이 빙 둘러진 너부죽한 모자를 썼고 커다란 입, 오똑한 코, 지그시 다문 입, 인자스레 내려다보는 눈매 등 자비로운 불상이 일품이다. 몸에는 예복을 걸쳤고, 두 손은 가슴에 정중히 모아졌는 데, 그 소맷자락이 유난히 선명하다. 서복신미륵은 하반신 일부가 생략된 채 기석(基石)으로 받쳐졌다.’고 여러 고서에 일반적인 평이 기록되고 있다.

자복사로 통칭되는 만수사·해륜사

동미륵상이 세워져 있는 이곳에는 시기를 알수 없는 만수사(萬壽寺)가 있었다. 산지천의 옛 지명은 산저천이고, 이 하천이 바다와 만나는 건입포는 탐라시대부터 제주와 육지를 잇는 관문이었다. 서미륵상이 있는 용화사 자리에 해륜사(海輪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만수사와 해륜사는 자복사로 통칭된다. 이들 사찰과 미륵이 동서자복 또는 동서미륵으로 불려온 것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사찰이자 미륵임을 짐작하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佛宇條)’에는 해륜사는 일명 서자복인데 주의 서쪽 독포구에 있다. 용연이 있는 포구이다. 만수사는 일명 동자복인데 건입포 동안(東岸)에 있다.’라 하여 해륜사는 서자복사, 만수사는 동자복사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2018년 발간된 강문규의 일곱개의 별과 달을 품은 탐라왕국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자복사의 성립과 존재 양상이라는 저서에 따르면, 자복사는 고유 명칭이 아니라 읍인의 복을 구하는 절이라는 의미로 고려시대에 보통명사로 통용된 개념이다. 제주의 동서자복사도 특정 사찰이름이 아니라 복을 기원하기 위해 동서에 세워진 고려시대 도량처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국가를 표방한 고려시대의 제주에는 많은 사원이 세워졌는데 자복사는 각 행정단위의 치소까지 설치되었다고 한다.

제주불교의 시작

탐라는 1002년과 1007년 잇따른 화산폭발로 관민 모두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여 있던 시기였다.

탐라의 지배층은 고려조정이 장려하는 자복사를 제주에도 건립해 제주선인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심어줄 상징적 조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자복사 건립은 고려조정의 요구와 화산폭발로 위기감을 극복하기 위한 탐라 내부의 욕구와 절박감이 맞물리며 실현된 사찰이라 여겨진다.

자복사와 미륵불 건립은 탐라와 고려의 관계을 모색하는 역사의 숨은 코드로 보여진다. 고려조정의 도움을 받아 지어진 자복사와 미륵불은 1011년에서 1012년 무렵에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삼양 원당봉에 있는 오층석탑보다 최소 100년 앞선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원의 제주지배기보다 훨씬 이전에 고려의 지원 속에 제주불교가 시작됐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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