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해녀 주도한 부정규탄 집회서 앞장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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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문신 김영집
일제강점기 교육자 김영택
제주지방법원장 역임 김영호 
초대 제주도의회 의원 김영희
해녀항쟁 주도한 김옥련
일제강점기에는 해마다 3월 하순이나 4월 초순께 제주의 모든 해녀가 어업조합의 지시를 받아 미역따는 날로 정하고 일제히 미역을 채취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해녀항일운동가 김옥련 선생은 일제 강점기 최대의 여성항일운동인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했다. 사진은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들의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일제강점기에는 해마다 3월 하순이나 4월 초순께 제주의 모든 해녀가 어업조합의 지시를 받아 미역따는 날로 정하고 일제히 미역을 채취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해녀항일운동가 김옥련 선생은 일제 강점기 최대의 여성항일운동인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했다. 사진은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들의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영집金英集1775(영조51) ~ 1827

(순조 27), 문신. 찰방. 자는 여성汝成, 본관은 나주. 제주시 화북동 거로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김익겸金益兼 또 어머니는 정<오드싱->이었다. 1814(순조14) 4월 제주찰리사겸 위유어사로 응교 이재수李在秀가 내도해 과거 시험을 실시한 바 있다.

시취할 때 유생 김영집과 그의 아우 김영업金英業, 변경준邊景俊, 강계우姜繼遇 4명을 문과에, 또 무과에는 김명훈金明勳 193(탐라기년에는 60명이라 기록됨) 모두를 전시에 직부하게 했다.

이때의 시제試題는 이아선양호연지기부以我善養浩然之氣賦였다. 이는 전년에 양제해梁濟海의 난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시행된 과장이었다. 이어 1817(순조17) 왕세자 입학 정시庭試 문과에서 병과로 형제가 함께 급제, 벼슬은 직강·예조정랑을 거쳐 강원도 회양군 은계찰방銀溪察訪을 역임하던 중에 사망했다.

대한민족해방기념비(대정초등학교 교정 일제강점기 봉안전奉安殿 자리). 해방 후 김영택 선생의 주도로 졸업생들이 세운 비석.
대한민족해방기념비(대정초등학교 교정 일제강점기 봉안전奉安殿 자리). 해방 후 김영택 선생의 주도로 졸업생들이 세운 비석.

김영택金榮澤1916(일제강점기)~1949, 초등학교 교장. 본관은 나주, 제주시 삼도동<제주-성안>에서 김종림金鍾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5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 일제 말기 대정국민학교에 재직 중이었다.

키가 8척 장신이고 굵직한 체구에 미남형 선생으로 통했다. 일본이 전쟁에 패하자 김영택 교사는 담임인 6학년 아동들에게 졸업 기념으로 대한민족해방-기념비를 건립하도록 지도, 비문은 선배 교사 박용후朴用厚에게 의뢰했다.

박 교사는 당시 모슬포의 정재正齋 고병오高炳五의 자문을 얻어 한문으로 비문을 지었다.

비문을 풀이하면 대한민국은 창업이래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나라가 발전했으며 강토는 아름답고 문물은 찬란해 여러 민족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어졌다. 그러나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을 입어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를, 고려는 글안을 물리쳐 이 땅을 지켜 왔고 민족정기를 보전하는 전통을 세웠다. ! 한말韓末에 이르러 일본이 청국과 러시아를 이긴 뒤 우리 겨레를 강압에 의해 경술합방의 조약을 맺어 우리의 자주권을 빼앗았다. 그 후 36년 간의 굴욕은 일찍이 반만년 역사에 없었던 일이다. 우리 민족은 광복을 위해 항일운동이 그치지 않았고 해내외에서 수많은 의사와 열사들이 그 장한 순국과 위국충절은 천추에 빛났다. 그 결과 단기 4278815일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에게 일본은 항복하고 우리 민족은 드디어 왜놈의 굴레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이 어찌 통쾌하지 아니한가! 우리들은 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이 비석을 세워 해방을 기념하는 바이다. 대정국민학교 제34·36·38회 졸업생 일동이 세움이다.

김영호
김영호

그는 성산읍의 풍천교豊川校가 개설되자 194691일 초대 교장으로 승진되어 떠났고 그의 능력이 인정돼 19483월 동남교東南校교장으로 이동, 이 무렵 4·3 사건이 일어났다.

무질서·무교육 상태에서 당시 학교의 등사판이 도난당하고 그 등사판에서 나온 불온 유인물이 빌미가 되어 애석하게도 계엄령 아래에서 피화被禍의 변을 당했다.

김영호金榮鎬생몰년 미상. 제주지방법원장, 변호사, 제주시 용담동<-두기>에서 태어나 1921년 제주농업학교 3년 졸업, 192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학과 졸, 194511서기특별채용에 의해 판사로 기용, 19462월 대구공소원(및 검사국)소속 제주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미군정에서는 판검사의 부족으로 제주도사법요원 시험을 합격한 뒤 1차 실무실습을 거쳤다. 제주43사건으로 재판건수가 폭증幅增해 처리가 어려울 때는 폭동관련 일부를 광주지방법원과 가타 법원에서 담당했으며 한편 계엄령 선포기간에 군법회의에서 처리하기도 했다. 후일 제주지방법원장, 1958319일 도지사실에서 제주도선거관리위원회 첫 모임을 가져 그를 위원장에 추대됐다.

김영희
김영희

김영희金瀛熙1896(건양1)~1979, 사업가, 제주도의원, 본관은 김해, 조천, 과도정부 입법의원立法議員 김도현金道鉉의 장남으로 애월리<하물> 태어나 19163월 제주농업학교 6회 졸

, 제주영림서의 산감山監으로 재임, 정부수립 후에 실시한 초대 제주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북제주선거구에서 김선희金瑄熙와 함께 형제가 동반당선同伴當選되어 커다란 화제話題가 됐다.

당시 불교 신도로서 1920년대 초 신병 때문에 관음사觀音寺에 요양차 투숙, 국유림 지대의 사찰 경내 토지를 관음사에 무료로 획급劃給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의 유공비有功碑가 사찰 경내에 남았다. 산감이었기에 일본인들이 하는 초기 재배법栽培法을 보고 애월면 광령리 경내의 한라산 중턱에서 초기 재배업에 착수, 재력을 이뤄 제주목재회사를 운영했다.

김옥련과 부춘화 등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주역들이 다녔던 하도강습소 1회 졸업기념 사진.
김옥련과 부춘화 등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주역들이 다녔던 하도강습소 1회 졸업기념 사진.

김옥련金玉蓮()1909(융희3)~?, 제주해녀의 항일활동. 하도리의 소녀회 회장, 구좌읍 하도리<별방> 서문동西門洞에서 14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야학은 농어촌의 문맹文盲 여성에

김옥련
김옥련

게 기초적인 지식을 가르쳤다. 1929년 당시 하도리에는 청년회 부녀부장은 부춘화夫春花이고 소녀회 회장은 김옥련이 맡고 있었다. 정부는 고인이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19311220, 하도리 해녀들은 해산물 매각 가격의 재평가에 대한 항의, 193217일 해녀어업조합 구좌지부장을 겸임한 강공칠康共七 구좌면장에 대한 하도리 해녀들이 주도한 부정규탄 집회에서도 항상 부춘화·김옥련이 앞장서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하도리, 종달리, 연평리, 세화리 등의 지역에서 가장 발전했다. 특히 구좌면 지역에서 당의 중핵적 조직으로서의 혁우동맹이 가장 성장해 그 조직 인원은 전도에 걸쳐 12명에 달했다.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소요죄로 형 확정될 때까지 미결 기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한영택韓榮澤(종달)과 결혼했다.

슬하에 12녀를 두고 부산에서 살던 김옥련여사는 이화梨花여대 교수인 딸과 함께 19958월 세화리에서 개최된 제주해녀 항일투쟁 기념대회에 참석,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의 박수를 받았으니 87세의 노구에도 힘이 넘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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