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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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화 수필가

태풍이 지나간 며칠 뒤, 뉴스에선 반갑지 않은 손님 예보가 흘러나왔다.

억수 같은 비가 흙을 씻어내 귤나무 뿌리가 앙상하게 자갈 위로 올라오고, 세찬 바람이 어린 귤나무를 뿌리채 뽑아 버렸는 데 연이은 가을 태풍에 귤밭이 망쳐질 생각을 하니, 망연자실 손을 놓게 됐다.

비는 초저녁부터 지붕이 뚫린 듯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이처럼 무서운 비가 내리던 수 십년 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1950년대 말, 가을걷이가 한창이던 그날 저녁도 하늘이 찢긴 듯 폭우가 쏟아졌다.

비옷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 아버지는 힘없는 우산 하나에 의지한 채 집을 나섰다. “곧 돌아올거여. 걱정하지 말라.” 육남매 중 둘째인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마당까지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어린 마음에 마른 아버지의 어깨를 채 가리지 못하는 작은 우산이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아버지가 향하는 곳은 집에서 30넘게 떨어진 한약방이었다.

지금처럼 길이 좋으면 걷기라도 좀 수월하련만, 당시에는 비포장 흙길과 산길을 헤쳐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아버지가 한밤중에 기어이 길을 나선 것은 뇌막염으로 입원했던 셋째 동생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며 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소식을 들은 친척들이 방문해 집 안은 이미 초상집 분위기였다. 그때, 아버지는 분연히 일어나 용하다는 한약집에서 약을 지어오겠다 했다. 소용없다고, 이 날씨에 갔다간 당신까지 몸이 상한다 말리는 친척들의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온 가족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중 난 깜빡 잠이 들었던 듯 싶다.

눈을 떠보니 어슴푸레 해가 밝아오고 다행히 비도 개운하게 그쳐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니 부엌으로 쓰는 초가에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아버지!” 난 한달음에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곁에는 하얀 종이로 감싼 한약재가 놓여 있었다. 가슴에 얼마나 소중히 품었던지, 흠뻑 젖은 아버지와 달리 한약재는 상태가 말끔했다.

정성껏 한약을 달인 아버지는 사경을 헤매는 동생의 입에 대나무 빨대를 꽂은 뒤 약을 흘려주기 시작했다.

잘 삼키지 못해 반은 밖으로 흐르는 데도, 한 사발을 다 먹인 뒤에야 젖은 옷을 벗고 잠을 주무셨다.

왜소한 사람이 참 강골이다!’ 자식을 살리려고 몇날 며칠을 매달리는 아버지를 보고 굳건한 노력이 마치 고래 심줄 같다며 이웃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았다. 그러나 한약을 먹인 뒤에도 동생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무당을 불렀다. 미신이 싫다던 어머니지만 자식을 위해서는 작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당마저도 희망이 없다고 그저 곱게 데려가 달라는 굿만 올리고 집을 떠났다. 아무도 말은 못했지만, 마지막을 준비하는 최후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성껏 약을 달이고 시간 맞춰 먹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수시로 손을 주무르고 가슴을 만져보고 동생을 보듬었다.

아버지의 정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일까. 한약을 먹인지 나흘이 되던 날, 동생이 기적처럼 눈을 뜨고 더듬더듬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룻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의사도 포기한 생명의 불씨를 되살린 것이다.

당시만 해도 뇌막염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사망하거나 뇌성마비 장애인이 됐는데, 동생은 말끔하게 병을 회복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흙 같은 어둠 속을 뚫고 길을 나서던 아버지. 자식을 지키기 위해 폭풍우 속으로 들어서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아직도 코끝이 시큰해진다. 그때의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를 먹고 보니 여섯 아이를 키우는 가난한 남자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까새삼 안쓰럽다.

매서운 폭우에 맨몸으로 맞서던 그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깟 태풍 따위에 지지 않기로 마음먹어 본다. 태풍이 지나간 뒤엔 반드시 환한 해가 뜬다는 걸 아버지께 배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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