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는 지휘자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는 지휘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강희창, 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1974년에 필자는 대학에 입학했다. 시험을 두 달 쯤 앞두고 서울에 와서 광화문에 있는 어느 학원에 다녔는데 최종 정리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학원에서 공부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근처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시켰는데 납작하고 노란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가 나왔다. 조금 크게 썬 돼지고기가 서너 점 들어 있었고 다진 마늘을 좀 많이 넣었는지 김치와 어우러져 독특한 냄새가 났다. 하얀 쌀밥에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지금까지 기억날 정도로 맛이 있었다.

김치와 돼지고기와 마늘과 여러 재료를 함께 넣어 찌개를 끓이면 김치 맛이 나고 돼지고기 맛도 나고 모든 재료들이 제각기 맛을 내긴 하지만, 찌개가 되기 이전의 맛과는 무언가 다른 맛을 내게 된다. 냄비에 들어가 함께 끓는 동안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통적인 신앙 공동체의 삶이 그와 비슷하다. 제각기 개성과 인격을 지닌 사람들이 오랫동안 함께 살아가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과 인격이 변화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많은 공동체들의 삶은 김치찌개보다는 샐러드에 더 가깝다. 김치찌개의 경우는 찌개가 되는 동안 모든 재료들의 맛이 조금씩 변해가는데 샐러드의 경우는 모든 재료들이 샐러드가 되기 이전이나 이후에나 본래의 맛을 그대로 지닌 채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인격과 개성과 인권이 강조되는 시대가 된 셈이다. 이런 시대에 공동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라야 하는가? 공동체의 지도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비슷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오케스트라에 속한 모든 악기들은 제각기 자신의 소리를 충실히 내야 한다. 모든 소리들이 세밀한 순서를 따라 뒤섞이면서 조화를 이루도록 이끌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지휘자는 서로 다른 많은 소리들을 세밀하게 분별하여 들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휘자는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서로 다른 많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전체를 이끌어가기 위하여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휘자들은 어떤 악기에 대해서는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이다. 소리를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지휘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최고의 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소리를 포기하고 다른 소리들을 듣기만 하면서 전체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많은 소리들이 함께 어우러지게 하면서 전체를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요즘같은 시대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공동체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많은 나라와 공동체에서 자기 소리만 내려고 애쓰는 지도자들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중이다. 듣고 싶은 소리만 들으려 하거나 자신의 소리만 내려고 애쓰는 지도자들이 이 세상을 굉음의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듯하다.

성탄절에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는 그런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찾아오셨다. 사람들이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 장소와 가려고 하지 않는 방향과 들리지 않는 소리를 선택하신 셈이다. 온 세상에 가장 널리 퍼진 소리가 바로 그 소리라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