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숨결따라 역사의 흔적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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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근대건축양식 살아있는 한림청장…요인들 이곳에 묵어
일제강점기 통조림 공장, 4·3당시 소개민 대거 수용되기도
옹포리 자리잡았던 제약회사 인근서 한림공업고등학교 개교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 진코지. 이곳은 옹포리어촌계가 마을어장으로 관리하고 있다.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 진코지. 이곳은 옹포리어촌계가 마을어장으로 관리하고 있다.

명월포, 독개, 독포라고도 불렸던 역사적인 마을 옹포에는 감태공장, 통조림공장, 한림청장 등 적지 않은 일제의 흔적들이 있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 시절 구축돼 확장된 한림항이 인근에 있어, 이 지역이 일본군들이 주둔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번 질토래비 역사기행은 옹포에 산재한 근현대 유물과 산마장에서 징발된 말들을 대기시키던 명월진성 마대기빌레를 들여다본다.

옹포에 산재한 근현대 유물과 유적

일본신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옹포별장이라는 곳을 탐사했다.

밀림에 가려져 있는 그곳은, 해방 직후까지 제주에서 흔하지 않았던 온수로 목욕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한림청장(翰林靑莊)이라 불리던 별장이다.

그 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경찰의 고위간부가 살았던 집이라 전해진다. 1929년 일본식으로 지어진 건물과 정원의 조경수로는 동경, 한라산, 안덕계곡 등지에서 200여 종을 이식했으며, 30여 평의 연못도 딸려있다.

별장 서쪽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일본식 신단이 있고, 건물 내부에는 가미다나라는 일본신을 모셨다고 한다. 삼성혈 인근에 있는 제주 최초의 관광호텔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나라의 요인들이 제주에 오면 이곳에 머물렀다 한다.

1930년 전후에 세워진 일명 우에무라 제약회사라는 감태 공장이 옹포리에 남아있다.

우애무라 제약회사의 감태공장터
우애무라 제약회사의 감태공장터

성산포의 제1감태 공장과 옹포리 감태 공장에서는 1955년까지 요오드 원료와 염화가리를 추출해 일본으로 보냈다.

이곳에는 통조림 공장도 들어서 있었는데, 공장을 창립한 사람의 이름을 빌려 다케나카(竹中) 통조림 공장으로 불렸다.

일본군은 1931년 군수용 통조림 시설을 이곳에 확장하고, 쇠고기와 청어 통조림 제품을 생산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에는 일본군 1200명이 주야 교대로 하루에 소 400마리를 도살하기도 했던 전시 국책사업장이었다.

이곳은 1949년 초 명월, 금악, 상명 등지에서 온 4·3 소개민들이 대거 수용되기도 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옹포리 295번지 일대는 일제 때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이 있던 곳이다.

1931년 군수용 통조림 시설을 확장시켰다. 이를 창설한 다케나카 신타로는 1892년 일본 교토(東都)에서 태어났다. 1926년 제주로 건너와 부친의 유업을 이어 대단위 목장과 우유제품 연구로 대성했다.

쇠고기 통조림에 이어 청어 통조림 제품으로 호평을 받았다. 식민지 한반도에서 강력한 사업가로 알려져 역대 조선주둔군 사령관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내방을 받았고 일본 산업협회 총재의 표창도 받은 바 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는 일본군 1200명을 상주시켜 주야 교대로 작업하게 해 하루에 소 400두를 도살하기도 했다.

공장부지 4800여 평, 공장건물 386, 창고와 사택 512평인 일본이 자랑하는 전시 국책사업장이었다.

한림공업고등학교 발상지에 세워진 표지석.
한림공업고등학교 발상지에 세워진 표지석.

한림공업고등학교 발상지인 옹포리 386번지 주변은 일본인이 1942년 태평양 전쟁 때에 제약회사를 설립해 해조류인 감태(甘苔)로 군수용 염산가리와 옥도(沃度·요오드인)를 제조 생산하던 곳이 있다.

이곳에서 195256일 한림공업고등학원 토건과와 기계과가 각각 3학급으로 도지사의 인가를 받았다. 한림중학교장 이기휴(李基休)가 학원장을 겸직해 한림초등학교 음악실에서 학교를 운영했다. 이어 한림읍장 김창우(金昶宇)를 기성회장으로 추대해 195347일 문교부의 정식인가를 받아 동년 419일 이곳에서 개교식을 열었다. 초대교장은 한림중학교장 강석용(康錫用)이 겸직으로 발령됐다.

당시 우에무라(植村) 제약회사의 공장부지 2240평과 공장건물 72, 또 제1창고 24평과 제2창고 22, 주택 36평의 일부를 수선해 관리실과 교실로 이용했다. 이듬해 현 한림공고 부지로 옮겨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마대기(馬待機)빌레

한림공고 재직 시 주민들로부터 마대기빌레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지명에 무언가 아련한 추억의 역사가 배어있을 것 같다고 여긴 나는 마대기빌레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역민들의 말과 나의 역사적 추리력이 더해 밝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주 선인들은 수풀에서 말들이 노니는 목가적인 풍경인 고수목마를 가장 아름답고 제주적인 풍경의 하나로 꼽았다.

1703년에 편찬한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의 41면 화폭 중 봉마공진, 산장구마, 우도점마등에 9000여 필의 말이 등장할 정도이다.

또한 이형상 목사는 한수풀과 관련해 명월시사, 명월조점, 비양방록 등 3점을 그리게 했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후세에 남긴 것이다.

명월시사(明月試射)는 명월진성에서 활쏘기 시합장면을, 명월조점(明月操點)은 명월진성에서의 훈련모습과 말을 점검하는 장면을, 비양방록(飛揚放鹿)은 사슴을 생포해 비양도에 방사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특히 비양방록에는 제주목 우면의 53개 마을 위치가 상세하게 표시돼 있을 뿐만 아니라 제주읍성에서 명월진성에 이르는 지형이 담겨 있다.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 패한 직후인 1277년 원나라는 말 160필과 말 다루는 목호들을 탐라국에 들여와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 목마장을 세웠다. 태조 이성계의 팔준마(八駿馬) 중 하나인 응상백은 제주에서 실려 갔던 말이다.

국영목장인 10소장과 의귀리 출신인 헌마공신 김만일과 그 후손들이 기른 수많은 말들은 본토뿐만 아니라 중국 등지로 보내지기도 했다. 제주마가 반출된 포구는 조천포·화북포·어등포(구좌읍 행원리애월포와 특히 명월포이다. 여러 산마장에서 징발된 말들은 명월진성 밖에 위치한 마대기빌레에 집결, 대기했다가 명월포(옹포)를 통해 실려 나갔던 것이다.

마대기빌레는 바위 지대를 농경지로 개척하기 위해 이곳 선인들이 흘린 땀방울의 현장이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밭을 개척한 제주선인들의 억척스러움과 고단한 일상이 묻어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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