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조국 광복 위해 청춘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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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교육자 김용하, 초대 제주도교육위원 역임
김용해, 일제 치하 오사카에서 신간회 활동에 헌신
조선 중기 무신 김용호, 임진왜란 전후 왜구 침입 막아
조선 후기 무신 김우수, 충청남도 해미현감 등 역임
김우종, 문사로 학문 몰입해 후진 양성 위해 힘 쏟아
헌마 공신 후예 김우천, 道 유형문화제 급제선생안 완성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제주 전역은 일본군에 의해 요새화됐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제주에는 일본군 제58군 소속 6만6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해 10월 미군이 일본국 제58군의 탱크 등을 무장해제 하고 있다. 이 사진은 제주4·3 관련 미국 자료 수집 공동 조사반이 미국에서 입수해 공개한 것이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제주 전역은 일본군에 의해 요새화됐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제주에는 일본군 제58군 소속 6만6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해 10월 미군이 일본국 제58군의 탱크 등을 무장해제 하고 있다. 이 사진은 제주4·3 관련 미국 자료 수집 공동 조사반이 미국에서 입수해 공개한 것이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용하金龍河1906(광무10)~1990, 교육자, 항일운동가. 본관 경주, 안덕면 창천리<창고->에서 김봉규金奉奎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3월 제주농업학교 3년을 졸업하고 대정면 무릉리의 이문서숙以文書塾 숙장 김석주金錫柱의 초빙에 의해 송진부, 강운옥康雲玉 등과 함께 교사로 활동했다. 특히 민족주의 교육자로 낙인찍혀 일제 당국으로부터 요시찰要視察 대상이었다.

부친 김봉규는 한말韓末 대정향교 직원直員을 지낸 한학자, 반골反骨 분위기를 잘 이해하고 국망國亡의 한을 되씹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문서숙은 무릉·신도·영락 등지에서 통학했으며 김용하는 1934년 몰래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 오송로吳淞路 극험리克險里 658번지에 머물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살피고 임정 요인과 자주 접촉, 적당한 시기에 광복군으로 들어갈 기회를 보고 있었다.

마침 이 무렵에 부친이 일본의 회유에 의해 안덕면장으로 등용돼 빨리 귀향을 재촉하니 조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초등학교 교사로서 교직의 길을 택하게 됐다.

초대 제주도교육위원으로 임명되자 초대 교육감 선거에 참여했다. 정년으로 교직에서 물러서고 오랫 동안 남제주군노인회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김용해金容海1902(광무6)~?(분단시대), 일본 오사카에서 신간회의 항일활동.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운동가.

해방 후 민전民戰 부의장. 자 백종百宗. 본관 광산, 애월읍 하귀리<귀일> 김대수金大洙의 장남이니 김용하金容河 도지사의 종제가 된다. 1922년 제주농업학교 1년을 수료, 부친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1929225일 민족 단일전선 신간회新幹會 오사카지부의 간사를 맡았다.

당시 제주 사람으로서 대판지부의 회원으로 참여한 사람은 김문준金文準(조천), 조몽구趙夢九(성읍), 김달준金達俊(하귀) 등인데 모두 항일운동에 헌신,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이 신간회란 1927년 조직된 민족주의 항일단체이고, 회장은 이상재李商在였다.

해방되기 1년 전쯤 귀향, 1945년 광복 후 건준建準 애월면 위원장에 피선되고 동년 910일 전도 읍면 대표들이 제주농업학교에 모여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장에 오대진吳大進(모슬포), 부위원장에 최남식崔南植(삼도, 일명 光植)이 선출되고 각 부장을 임명할 때 산업부장이 됐다.

1947223일 읍면 대표 315명이 모여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다.

먼저 회의진행을 원만하게 집행하기 위해 임시 집행 의장단으로 김용해와 김시탁金時鐸, 고창무高菖武 3명을 선출하고 회의를 진행시켜 의장단에 안세훈, 이일선李一鮮, 현경호玄景昊 3명을, 또 부의장에는 김용해를 비롯해 김택수金澤銖, 김상훈金相勳, 오창흔吳昌昕 4명을 선출했다.

그리고 집행위원으로는 김정로金正魯 33명이 확정됐다.

한편, 3·1절 기념행사 때 좌익계의 지도부가 파업 투쟁으로 돌입하자 34일 동 투쟁위원회 소속 주도 인사 28명을 구금, 그도 검거됐다. 동년 37일 미군정 당국에 의해 전원 석방됐다. 그 후 제주도를 떠나 당적을 목포로 옮겨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혹은 옥중에서 나와 행불行不됐다고 전해진다.

김용호金用瑚1551(명종6)~1602(선조35), 무신. 첨사.

본관은 나주, 산북 애월읍 엄장嚴莊(현 신엄)리에서 건공장군建功將軍 김성조金成祖의 아들로 태어났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 전후를 통해 왜구의 침입을 막는데 힘썼으며 부친을 따라 왜변을 당할 때마다 전공을 세웠다.

왜적을 치는데 전공이 있어 전라도 순천의 방답진防踏鎭첨절제사로 임명됐다.

김우수金寓洙1832(순조32)~1873(고종10), 무신. 해미海美현감. 자는 성녀聖汝, 본관은 김해. 산북 조천읍 신촌리<숙군>에서 이른바 이동파梨洞派 김씨 집안의 김종윤金鍾允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천 만세 운동시의 독립운동가 김경희金慶熙의 조부이다.

1857(철종8) 무과에 급제하고 1865(고종2) 7월 부용백夫龍伯의 후임으로 명월만호에 부임, 그 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873년 충청남도 해미현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 돼 동년 511일 재임 중에 죽었다.

김우종金禹鍾1859(철종10)~1897(광무1), 선비. 자 경문景文 혹은 문찬文贊, 호 귤헌橘軒, 본관 김해. 5대조 때에 조천리에 낙향. 독립운동가 원천源泉 김순탁金淳鐸의 아버지이다.

1891(고종28) 제주목사 이규원李奎遠이 실시한 사마시司馬試에 김학현金學鉉(제주-성안), 김항유金恒裕(조천), 전군형全君亨(상가더럭)과 함께 합격했다. 문사로서 학문에 몰입하면서 후진을 가르치는 데 힘을 쏟았다.

문행文行이 뛰어나 사림에서 경학사經學士로 천거했다.

김우천金羽遷 무과 급제 교지.

김우천金羽遷1654(효종5)~1726(영조2), 무신. 자 홍교鴻喬, 본관 경주. 정의현 김반金磻의 아들이자, 헌마공신 김만일金萬鎰의 증손, 산마감목관 김대길金大吉의 손자이다.

1680(숙종6) 제주순무어사 이증李增에 의해 문무를 시취할 때 그는 무과에 급제, 문과에 정희량鄭希良(일명 정희관)을 뽑고 무과에 김우천, 이윤李玧, 강위재姜渭載, 김석金錫, 고요신高堯臣, 고원진高元進, 고원익高元益, 이기철李起哲 등을 뽑았다.

그는 동년 전시무과에 급제했다. 1681(숙종 7)1682년 두 해에 걸쳐 흉년이 들자 준비해둔 곡식 140섬을 내놓아 굶주리는 이에게 나누어주어 조정에서 부호군副護軍으로 가자加資했다.

벼슬은 훈련원 주부·만호를 역임했다. 1720년경에 그를 비롯해 김여강金汝江, 김우달金羽達, 양유성梁有成 등의 건의로 급제선생안을 완성하였다. 이는 1558(명종13)의 무오방戊午榜부터 무과 급제자 총 338명의 이름을 기록한 것으로 오늘날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돼 귀중한 자료로 보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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