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복 많은 한 해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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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진 수필가

어느 모임이든 말을 맛깔나게 하는 사람은 꼭 있습니다. 앞에 놓인 음식보다 더 구미를 당기게 하죠. 오늘 만난 J가 그러한 타입니다. “허리가 아파 동네 새로 생긴 한의원에 갔는데,” 그녀의 중저음은 늘 귀를 쫑긋하게 합니다.

대개 한의원에 가면 아픈 곳을 물어보고 침과 물리치료를 병행하며 통증을 완화시키는데 그녀가 간 그곳은 달랐답니다.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생겼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의 심정은 어떤지를 시시콜콜 캐물었다는 겁니다.

얘기를 하다 J는 그녀 특유의 눈웃음을 짓더니 다시 말을 잇습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편했는가 하면 아잇적 부모님이 이혼한 사실과 내가 독신으로 사는 이유까지 슬슬 풀어냈다니까.” 자기 안에 있던 억눌린 감정을 조금씩 내려놓았나 봅니다.

한번은 한의사가 대화가 길어지자 직원들을 먼저 퇴근시키고 끝까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설마, 재차 확인했습니다. 알다시피 병원에 가면 오랜 기다림에 비해 문진 시간이 고작 몇 분이라 허탈하지 않았던가요. 혹 그녀에게만 그런 게 아닌가 물었더니 다른 이에게도 그리 하는 걸 봤다고 합니다.

의술을 상술로 치부하는 작금의 시기에 보기 드문 모습이 아닌가요. 통증의 원인을 심리적인 것에 두고, 육체의 병을 치료하기 전 환자와 교감하며 마음의 문을 먼저 열고 있다니. 의술이 곧 인술임을 펼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언제부터인가 물질보다 사람이 우선인 이야기를 들으면 어깨가 으쓱거립니다. ‘아직 세상은 살 만해.’ 식상하여 귓등으로 흘렸던 말도 내가 뱉으니 다르게 다가옵니다. 따뜻합니다. 이 훈훈한 바람에 며칠 전 동네를 시끄럽게 했던 옆집 자매의 유산 싸움에 대한 씁쓸함이 멀리 물러갑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로합니다. 이윤이나 실리만 추구하면 힘들 때 못 버텨서 모든 선택의 기준은 오직 사람이라던 유명 영화배우의 인터뷰가, ‘택배 배송 수레 금지’를 내건 한 아파트 단지 안내문 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는 쪽지들을 붙여 없던 일로 만든 입주민들의 맘 씀씀이가 아름답습니다.

물질의 풍요와 정신적 여유는 함께 가기 어렵다고 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니 5G니 하는 말들이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결국 헛헛한 마음을 채우는 것은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아닐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빚어지는 관계 말입니다. 돈으로 사람을 부릴 수 있지만 관계는 살 수 없습니다. 나와 타인이 같은 선에 서야 하기 때문이죠.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에서 저자 고미숙은 삶을 ‘관계의 지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관계란 명성과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인맥’이 아니라, 공감과 소통을 전제로 하는 ‘인복’이라 합니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이 가진 많은 것을 빼앗을 수 있지만 이것만은 안 된다 하는 공감 능력 말입니다. 아울러 저자는 인맥은 불안을 부추기지만 인복은 불안을 치유한다며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튼튼한 인맥보다 좋은 인복이라 합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복은 거저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지지고 볶는 일상 속에서 베푼 만큼 돌아오는 게 정이니까요. ‘정’이 공감과 유사한 감정의 무늬를 지닌다고 하는 것도 그런 까닭인 것 같습니다.

2020년 경자년(庚子年)이 설렘과 기대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모두에게 무엇보다 인복 많은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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