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로부터 제주를 지켜준 군사적 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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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때 목성 구축 후 석성 개축
한림항 등 건설 탓 일부 허물어
남문 옹성·대문 등 일부 복원돼
이경록, 최장기간 제주목사 수행
왜적 막기위해 방어시설 정비해
명월진성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성곽이다.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목성(木城)으로 만들었다가 훗날 석성(石城)으로 쌓았다. 사진은 명월성지 남문 전경.
명월진성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성곽이다.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목성(木城)으로 만들었다가 훗날 석성(石城)으로 쌓았다. 사진은 명월성지 남문 전경.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위치한 명월진성(제주도기념물 제29)은 비양도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지어졌다. 왜선이 비양도 주변에 정박해 민가에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해 1510(중종 5) 목사 장림이 이곳에 목성을 쌓아 진을 구축했다. 이번 질토래비 역사기행은 명월진성을 돌아보고 최장기간 제주목사 직을 수행하는 기록을 세웠던 이경록 목사를 알아본다.

왜구의 침임에 대비해 쌓은 명월진성

명월진에는 만호 1, 치총 4, 수솔군 82, 성정군 330, 유직군 99, 진리 22, 서기 30명 등 총 568명이 있었고 2봉수(도내봉수, 만조봉수)7연대(귀덕연대, 우지연대, 죽도연대, 마두연대, 배령연대, 대포연대, 두모연대)를 관할했다

명월진의 책임자인 만호는 조선 후기 무관직(4) 벼슬로, 명월진성 남문 앞에는 112명 만호들의 재직기관 등을 적은 만호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진성 북쪽 만호기념비 옆에는 오래된 만호공덕비 5기가 있다

성내에는 수군만호(현 제주방어사령관에 해당되는 직위)가 주둔했고 활터가 네 곳 있었다

성벽의 흔적은 남쪽 성벽 일부에서 확인할 수 있고 수운교 한림지부와 극락사와 한림정수장 일부를 둘러쌓고 있던 북쪽 성벽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성의 전체적인 모양은 북서와 남동 방향으로 조금 긴 네모진 타원형이다. 남문 앞에 옹성이 복원돼 있는데, 2001년 남문지 보수공사 중 주춧돌, 돌저귀를 원형 발굴했다. 이어 20022월 명월성 성곽 보수공사 중 옹성터에 있던 농가를 철거해 농가 가장자리에서 옹성(내탁) 기단석 10미터를, 옹성 외탁 기단석 3미터와 지대석을 원형으로 발굴했다. 이를 토대로 남문 옹성과 대문을 복원했고 동문 터의 옹성 일부도 남아 있다

외벽의 일부만 남아 있는 옹성 주변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다. 남문지와 동문지 사이에는 3개소의 치성이 있고 외벽의 일부가 전 구간에 걸쳐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남동쪽의 성벽은 남아 있으나 북서쪽의 성벽은 일부 기단석을 제외하고 거의 없어졌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한림항 건설과 방파제 공사를 하면서 성담을 허물고 그 돌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명월진의 남문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성벽의 바깥쪽에 해자(垓字)를 설치했던 자리에는 밭 모양이 길게 남아 있다. 화산회토인 제주에서는 물을 해자에 채워두지 못하기 때문에 가시가 크고 단단한 탱자나무를 심었다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 소재 명월성지 전경. 순력한 내용(탐라순력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 소재 명월성지 전경. 순력한 내용(탐라순력도)

목성을 석성으로 쌓은 이경록 목사

절해고도 제주섬에는 조선시대 286명의 목사가 부임했다. 제주는 군사상 요충지이기에 주로 무신이 파견됐으나 더러 문신이 파견되기도 했다.

이경록(1543-1599) 목사는 성웅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두 사람 모두 서른 살을 넘긴 나이인 1576(선조 9) 나란히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이경록은 40대 중반인 1587(선조 20) 3품인 경흥부사가 됐다. 경흥은 함경도 두만강 하류 지역으로 여진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종이 김종서를 시켜 설치한 6진 중 한곳이다. 그의 이전 직책이 종6품 현감인 것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경록은 이순신보다 1년가량 앞서 만호로 부임했다. 만호란 요충지의 방비를 전담하는 무장으로 종4품 무관직이었다.

이경록은 여진족과 맞선 국경지대 고을의 수령으로, 이순신은 그 일대의 방비를 맡은 무장으로 함께 근무했다

나라를 운영하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평을 듣는 선조이지만, 곧 일어날 임진왜란 때 두 사람이 쌓은 공적을 생각하면 이 인사만은 최선의 선택으로 평가된다

이경록은 나주부사 재직시 임진왜란이 벌어져 왕이 피난하는 상황에서 의병장 김천일과 함께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선조는 이경록을 15927월 제주목사로 임명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관리들은 제주를 이매(魑魅) 즉 사람을 해치는 도깨비와 괴물이 사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제주역사문화나눔 연구소장 김일우 박사는 조정에서 제주도를 왜적에게 빼앗겨서는 안 되는 군사 요충지로 판단, 일본이 제주를 침략하려 한다는 의도를 간파해 이경록을 제주목사로 부임시켰다고 진단했다.

15927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경록은 제주의 방어시설들을 정비하는 한편, 제주에 있는 군사들을 훈련시켜 바다를 건너가 왜적과 싸울 계획을 세웠다

1702년(숙종 28) 이형상 제주목사가 명월진성을 순력한 내용(탐라순력도)
1702년(숙종 28) 이형상 제주목사가 명월진성을 순력한 내용(탐라순력도)

이경록은 전쟁이 끝난 후인 1599년 초 제주에서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7년 여를 재임함으로써 최장기간 제주목사 직을 수행하는 기록을 남겼다

선조는 절해고도에서 장기간 근무토록 한 점이 미안했던지 1596년 다음과 같이 하명했다. ‘제주목사 이경록은 이러한 격변을 당한 때에 해외고도(海外孤島)를 수년 동안 홀로 지켰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듣건대 늙은 아비가 있다고 하니, 승진 제수해 그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이후 이경록은 제주성 바깥에 도랑을 파고 성 위에 제승정(制勝亭)을 짓는 등 방어시설을 정비했고, 나무로 만든 성인 명월진성을 돌로 쌓아 개축했다

제주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성산포에 산성을 쌓던 중 임진왜란이 끝나는 1599년 초 병으로 사망했다. 이처럼 이경록 목사는 여느 목사들의 재임기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오랫동안 제주목사 직을 수행했고, 마지막까지 제주의 방어시설을 돌보다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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