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상황에 준비된 제주 대표 무관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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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과급제자를 많이 배출한 김해김씨
동반·서반 합쳐서 양반으로 호칭
과거 급제·관직 진출…직위 세습
김해김씨, 무과 급제자 다수 배출
제주 전체 급제자 수의 12% 차지
정보·능력 사전 습득…환경 활용
지금의 성내교회 자리에 있었던 조선시대 출신청(出身廳). 이곳은 원래 옛 병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훈련청(訓練廳)이 있던 곳으로 후에 무과에 급제한 사람들이 근무하는 관아인 출신청으로 바뀌었다. 사진은 제주성내교회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1911년의 모습. 출처: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지금의 성내교회 자리에 있었던 조선시대 출신청(出身廳). 이곳은 원래 옛 병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훈련청(訓練廳)이 있던 곳으로 후에 무과에 급제한 사람들이 근무하는 관아인 출신청으로 바뀌었다. 사진은 제주성내교회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1911년의 모습. 출처: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지금도 양반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원래 이 말은 조선 시대의 동반과 서반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었다. 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던 경복궁 근정전 안은 북쪽에 남쪽을 향한 용상이 있고, 신하들은 동서로 나뉘어 서서 용상에 앉은 임금을 바라보게 돼 있다. 이때 동쪽에 도열한 동반은 문신, 서쪽에 도열한 서반은 무신이었다.

조선 시대에 양반이 되는 방법은 과거에 급제해 동반이나 서반에 속한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얻은 양반의 직위는 세습됐다. 법에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3대 이상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양반이라고 부르기가 힘들었다.

조선 후기에 가면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한 몰락 양반이라는 의미의 잔반(殘班)’이라는 용어도 나왔다. 그래서 양반들은 양반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가문의 사활을 걸고 과거 급제자 배출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조선 시대에 과거는 문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과도 있었다. 조선이 문치주의 국가였던 만큼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문과 급제에 더 가치를 부여하기는 했지만, 무과도 과거였던 만큼 소홀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가문마다 문과와 무과에서 골고루 급제자를 배출하기도 하지만 집안의 전통 때문인지 무과 급제자를 유독 많이 배출한 가문도 있다.

제주에 정착한 김해김씨가 이런 가문이 아니었을까? 김해김씨는 한국에 존재하는 성씨 중 가장 많은 인구 분포를 보이는 성씨 중의 하나이다.

제주도에도 김해김씨가 매우 많다. 그래서 정확한 입도 경위를 알기가 매우 힘들다. 김해김씨가 제주도에 입도하게 된 경위는 여러 갈래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제주도가 같이 만든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디지털제주문화대전에 의하면, 김해김씨 입도조로 김만희(金萬希), 김영선(金永善), 김응주(金膺珠), 김돈(金敦) 등 매우 여러 갈래가 있다고 알려진다. 이들은 조선 초기부터 들어오기 시작해 조선 중기까지 제주도에 들어와 정착했다. 이렇게 여러 갈래여서 무과 급제자의 출신 연원을 분파별로 일일이 밝히기는 어렵다.

대신 김해김씨에서 배출한 과거 급제자의 전체적인 윤곽만을 살펴보겠다.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 정보가 전체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데이터베이스를 보면 제주 거주 김해김씨 중 문과 급제자는 1783년 급제한 김용(金墉)1863년 급제한 김병수(金炳洙) 2명만 보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무과 급제자는 1673년 급제한 김상구(金尙句)를 비롯해 19명이 보인다. 제주 지역 전체 무과 급제자 수가 161명이니 전체의 12%가 김해김씨다.

1765년도 제주 지역 무과 급제자(‘을유식년문무과방목(乙酉式年文武科榜目)’)
1765년도 제주 지역 무과 급제자(‘을유식년문무과방목(乙酉式年文武科榜目)’)

특히 1765(영조 41) 식년시에서는 김해김씨로 기록된 사람 11명이 동시에 선발됐다. 김응한(金應漢), 김응사(金應師), 김재중(金在重), 김중업(金重業), 김진기(金鎭基), 김영흥(金榮興), 김광세(金光世), 김중홍(金重泓), 김억겸(金億兼), 김치준(金峙峻), 김익경(金益鏡) 등이다.

이들은 평소 꾸준히 무과를 준비하고 있다가 시험 기회가 되자 응시해 다 같이 급제한 것으로 분석된다. 급제자 대부분의 전력이 한량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시험 이전에는 관직에 종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보통 무과 급제자 명부를 보면 급제자 이름 앞에 급제자의 전력이 기재되는데 이를 통해 이들의 급제 이전 경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이들이 왜 문과도 아닌 무과를 준비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집안 내력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과거 급제자를 기록한 방목에는 급제자의 아버지 이름과 아버지의 경력이 추가로 기록돼 있다. 이 기록들을 정리하면 집안의 내력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본관이 김해김씨로 기록된 급제자들의 아버지를 보면 업무(業武), 겸사복(兼司僕), 부사과(副司果), 정병(正兵) 등 이전부터 군사 관련 직업에 종사하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제주 출신 김응태가 급제한 1783년의 무과방목을 보면 시험 과목은 서서 활쏘기, 쇠도리깨 치기, 말 달리며 활쏘기, 조총 사격, 병법서 강론 등이었다.

제주에서 시행된 과거만을 기록한 탐라빈흥록을 보면 제주 무과에서는 주로 활쏘기 능력과 조총 사격의 시험이 이뤄졌다.

이중 조총은 임진왜란 이후 널리 전파되기는 했지만, 개인이 쉽게 가질 수 없는 무기였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제주에서 시행된 무과 시험에 조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실록에는 병조가 아뢰기를, "제주의 무과 별시의 규정을 조총(鳥銃)15점을 주고 관중(貫中)30점을 주는 것으로 할까요?"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기록돼 있다.(77, 1596724)

따라서 무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조총을 포함한 다양한 무기를 만져볼 수 있고 또 이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돼야 했다.

이로 미뤄 제주의 김해김씨가 이미 무관이나 무관 관련 직종으로 많이 진출해 무과 응시를 위한 정보와 능력을 사전에 습득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무예도보통지’의 말타고 쇠도리깨 치는 모습
‘무예도보통지’의 말타고 쇠도리깨 치는 모습

무과에서는 한 번에 28명 내외의 급제자를 선발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오면서 전체적인 무과 급제자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국방력 강화를 위해서 장수들을 많이 선발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때로는 무과 응시 자격을 양반의 범위를 넘어 평민에게까지 확대하기도 했다. 그 결과 1765년 식년시에서는 조선 전역에서 228명의 급제자를 선발했다. 그리고 이 시험에 제주 김해김씨가 대거 급제한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제주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무관으로 진출하는 길을 같이 넓혔다. 김해김씨는 이런 환경을 가장 잘 활용한 준비된 가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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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양창진(梁彰珍)은…

▲1967년생

▲제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석사. 박사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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