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가 김유환, 혁우동맹·조천 소비조합 등 앞장
조선 중기 문신 김윤①, 제주판관 부임…교풍 일으켜
조선 후기 무신 김윤②, 안경운 후임 제주목사에 도임
김윤병, 창의병 일으켜 송계홍·강유석 등의 민란 진압
김윤옥, 제주청년동맹 화북지부 활동…징역 6월 선고
▲김유생金有生(여):생몰년 미상. 우도에서 태어나 강관순康寬順과 결혼하고 함경북도 청진에서 남편이 죽자 이를 운구해 우도봉에 안장했다.
▲김유환金瑬煥:1902(광무6)~?(미군정기), 제주의 혁우동맹과 조천 소비조합의 항일운동. 본관 김해. 조천읍 조천리<梨洞>의 김시전金時全의 장남이다.
1921년 3월 서울 사립 중동학교에 입학, 1927년 7월 3학년 때 중퇴하고 귀향했다.
신문기자를 하면서 1927년 신좌新左소비조합 상무이사, 1928년 2월 6일 조천리 민풍진흥회의 주도하에 금주운동을 전개하여 건전한 민족 기풍을 진작했다.
이에 윤성종尹性鍾, 김시추金時秋, 김유환金瑬煥 등을 구속하자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했다.
1930년 조천 청년동맹 간부들이 야학 활동을 도우며 항일 공산주의로 전환하였다고 김순탁金淳鐸, 김유환, 김시추, 윤창석尹昌錫, 김지환金址煥, 김서호金瑞鎬 등을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목포검사국으로 송치했다.
김유환은 1931년 음력 1월 초순경 밤에 강창보의 주도하에 제주읍내 부태환夫泰煥의 집에서 신재홍申才弘, 장종식張鍾植, 김민화金玟華, 김한정金漢貞 등과 함께 제주도 사상운동 비밀 간담회를 개최했다.
또한 조선 청년동맹과 신간회 등의 해소 문제·여성 문제 등을 종종 협의해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 조직에 합류했다.
김유환은 1931년 11월 25일 강창보의 집에서 강창보姜昌輔의 권유로 제주도야체이카에 가입, 주로 운동자금 조달 등의 활동을 했다.
1932년 1월 구좌 동부 일대에서 해녀 항일투쟁이 거세게 일어나자 혁우동맹이란 비밀 조직이 그 배후임을 알고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에 4년 집행유예가 내려졌다.
1935년부터 김시용金時容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운동에 공명하면서 지하활동에 들어갔다.
일제는 사상범 예비 단속령에 의해, 그는 1939년 12월 9일 광주보호관찰소의 관찰에 붙여져 요시찰要視察 대상으로 감시가 강화됐다.
또 조천 소비조합 운동의 일환으로 반전사상을 계몽하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주민에게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부당성, 또 창씨제도에 대한 부당성과 통제 경제의 모순성 등을 지적하고 지원병 제도를 강제 징집이라고 역설했다.
반일反日·반전反戰 사상을 고취하면서 치안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1942년 8월 13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윤金崙①:생몰년 미상, 제주판관.
1528년(중종23) 5월 김일원金鎰元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529년 6월에 떠났다. 이에 앞서 김경준金敬俊을 제주판관으로 제수했지만 임지로 가는 것을 기피하자 김윤金崙을 보낸 것이다.
외적을 막기 위해 궁시弓矢에는 힘쓰나 교학敎學 관계에 해태하니 교생 중 선발, 서울의 성균관 하재下齋에 파견하여 학문을 닦아 교풍敎風을 일으키게 했다.
이는 1530년 6월 제주목사 송인수宋仁粹의 건의를 조정에서 받아들여 예조에 하명한 것이다.
▲김윤金潤②:생몰년 미상, 무신, 제주목사. 1743년(영조19) 3월, 전라좌수사에서 전임되어 안경운安慶運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44년 9월에 떠났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마애명이 방선문訪仙門의 바위에 있다.
▲김윤병金潤柄:1838(헌종4)~1908(융희2), 명월만호, 초명은 김의병金宜柄, 본관 김해. 조천읍 조천리<梨洞>의 김기행金沂行의 아들이다. 1859년(철종10)에 무과에 합격, 1879년 7월 신양기愼良琦의 후임 명월 만호로 와서 같은해 11월에 그만뒀다.
1896년 4월 송계홍宋啓弘(오라)·강유석姜瑜奭(오등) 등이 민군을 이끌어 반신제 ·반개화를 표방하며 민란을 일으키자 김윤병은 전 군수 채구석蔡龜錫과 함께 창의병을 일으켜 진압했다.
1898년(고종2) 방성칠란으로 조천의 김윤병 및 조카 평창平昌군수 김희주金熙冑의 크고 작은 집 등 7·8호가 전소됐다.
▲김윤옥金潤玉:1907(융희1)~1983, 제주청년동맹 화북禾北지부 항일활동. 본관 김해. 산북 화북1동<벨-도>에서 김진현金震鉉의 아들로 태어나 미곡상을 운영했다.
제주청년회 화북지부의 간부로서 1929년 5월 하순 화북사립보통학교의 교사 문모의 학생지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교사 배척운동을 일으켰다.
청년회원 김윤옥, 김배현, 신대유 등은 1929년 6월 2일 밤에 화북소년회 회원 10여 명을 모아놓고 교사 배척운동 계획을 세웠다.
같은해 6월 5일 청년회원들은 교사 문모가 학생 김필규金必圭를 때린 것을 강력히 항의, 사과문을 게재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되자 6월 7일 제주경찰서 경찰관 4~5명이 제주청년회 화북지부 위원장 신대유愼大瑜와 김배현金培鉉, 김윤옥金潤玉, 김광후金光厚, 소년단원 허성찬許性燦, 이진형李珍珩, 이현규李賢奎 등을 경찰서로 압송했다.
1931년 7월 31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강윤석, 부병훈은 각기 징역 10월을, 임상호, 김윤옥은 각기 8월을 선고받아 항소했다. 같은해 10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들 중 신대유, 김배현, 김윤옥 등은 1929년 7월 29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법률 위반으로 각기 징역 6월을 선고하자 항소, 같은해 11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