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인의 희생자 70여 년만에 '가족 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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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희생자 유해 신원확인 보고회…"이제야 시신이라도 찾아서 다행"
22일 4·3희생자 발굴 유해 신원확인 보고회에서 한 유족이 유골단지를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22일 4·3희생자 발굴 유해 신원확인 보고회에서 한 유족이 유골단지를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이제야 아버님을 보게 됐습니다.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났는데 시신이라도 찾게 돼서 다행입니다.”

33살 당시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됐던 고(故) 고완행씨(대정읍 무릉리)의 유골단지를 껴안은 일흔 살이 된 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70여년 전 4·3의 광풍에 휘말려 시신의 이름조차 찾지 못했던 14명의 4·3희생자가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22일 4·3평화교육센터에서 발굴 유해 신원확인 보고회에 이어 유해를 4·3희생자 봉안관에 안치했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서귀포시 서홍동의 고(故) 현행주씨 등 1950년 예비검속 희생자 7명과 서귀포시 상효동의 현봉규·현춘공 형제 등 1949년 군사재판 사형수 7명 등 14명이다.

이들 유해는 2007~2009년 제주국제공항(옛 정뜨르비행장) 남북활주로 인근에서 발굴됐으나 신원은 확인되지 않다가 유족 291명의 추가 채혈과 최신 유전자 분석법인 SNP방식을 통해 이름을 찾게 됐다.

유족 대표인 김영호씨는 “19살에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형님(故 김영하)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됐는지 70여 년 동안 모르고 살았다”며 “어린 나이에 희생된 형님과 13인의 영령을 생각하면 원통하지만, 유해를 찾게 돼 편히 영면하게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은 “지금 밖에 내리는 비는 아직도 가족을 찾지 못한 원혼들의 통곡을 하는 눈물”이라며 “부모형제를 찾은 14인의 영령들은 부디 해원하고 영면하기를 기원하다”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4·3평화재단은 2006~2018년까지 12년간 진행된 유해 발굴 사업으로 제주국제공항(388구), 화북 별도봉 진지동굴(11구) 등 5곳에서 모두 405구의 유골을 찾아냈다.

지금까지 신원이 밝혀진 4·3희생자 유해는 ▲1949년 군사재판 사형수 74명 ▲서귀포 3면(서귀·중문·남원면) 예비검속 희생자 27명 ▲모슬포 예비검속 7명 ▲9연대 군인 2명 ▲민간인 23명 등 모두 133명(33%)이다.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은 “6·25전쟁 전사자의 유해 신원 확인은 2%도 안됐지만, 4·3유해는 33%나 신원을 확인했다”며 “다만, 300여 명이 희생된 제주북부 예비검속 희생자 유해가 발굴되지 않아 아픔이 지속되고 있다. 신원 확인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제주북부(제주읍·애월면·조천면) 예비검속 희생자들은 1950년 8월 19~20일 양일간 제주경찰서 유치장과 주정공장에 수감됐다가 제주공항에 끌려가 집단 학살됐거나, 제주항에서 화물선에 태워진 후 수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귀포 3면(서귀·중문·남원면) 예비검속 희생자 82명은 1950년 7월 29일 계엄사령부 지시로 군용 트럭에 실려 나간 뒤 행방불명됐다.

이들은 정방폭포 일대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됐으나 유해 신원 확인을 통해 제주공항에서 집단 학살돼 암매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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