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장아장 오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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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겨울 산 능선이 회색빛으로 단조하다. 문 닫고 무심했던 사이 애기동백꽃 다투어 피었다. 동그랗게 단장한 나무가 그대로 붉은 꽃방망이다. 칙칙한 겨울 빛을 밀어내며 마음의 한기를 거두어 간다. 한겨울에 비가 철없이 추적거려 봄 같다.

시내 변두리 찻집이다. 웃자란 잔디가 쓸리듯 옆으로 누웠다. 누렇게 시든 잎 허리엔 아직 초록빛이 남아 있다. 돌담 귀퉁이 수국은 마른 꽃과 잎을 마저 내려놓지 못했다. 허옇게 바랜 헛꽃이 배배틀어진 채 서걱거린다. 정교한 거미줄 같은 잎맥 사이로 찬바람이 성가시게 들락거려도 무심하다.

조락의 뜰에는 서리 맞은 연보라 국화꽃이 후줄근한데 향기는 여전하다. 주름이 늘어도 향기로운 여자로 살고 싶은 내 소망처럼. 며칠 전 베란다 오지항아리에 꽂은 노란 꽃 몇 송이, 식탁 위 유리컵 속 자주색 국화는 여전하다. 옛날 집 울타리 밑에 하얗게 무서리를 이고 피었던 흰 국화꽃이 떠오른다. 해 들면 고개 발딱 치켜들고 자존을 세우던 자태, 그 시절 나의 자존감도 그랬을까.

물기 머금은 단풍잎을 자박자박 밟으며 걷는다. 걸음마다 붉은 단풍잎으로 피어 날 것 같은, 겨울 한낮이 참으로 고즈넉해 한가롭다. 가까이 있던 것들, 떠난 것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푸른 이파리가 가슴 뛰는 청춘이었다면, 현란한 단풍은 지고지순한 정열인 것을. 지난해 구실잣밤나무는 원 없이 열매를 달았었다. 잘 여문 열매들이 즐비하게 떨어졌다. 튼실한 것들 틈에 못난이 무녀리도 귀한 것이다. 작다고 하찮게 볼 게 아니다. 원대한 우주를 품고 있을지 누가 알랴. 찬 물방울이 정수리에 떨어진다. 나른하게 늘어진 정신 줄에 죽비를 치듯 깨어나라 한다.

시멘트 축대를 줄기차게 기어오르던 담쟁이가 뒤늦게 숨을 고른다. 때를 놓치고 잎마다 붉으락푸르락 물들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여름내 화덕같이 달아오른 담을 의지해 홀로 사랑을 키운 노역이 가없이 어여쁘다. 내겐 담쟁이처럼 수줍게 얼굴 붉힐 일도 가슴 설렐 기다림도 없다. 빛이 사위어간다는 건 가슴 시리지만, 주어진 몫을 그런대로 마무리했으니 이만하면 된 일이다.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그런 열정이 그리운 날, 여윈 가슴에 물기 어린다. 무엇이라도 좋다. 따뜻한 손잡아 메마른 뜰에 꽃 피울, 심금을 울리는 영혼을 품고 싶다.

겨울 한 자락을 붙들고 아장아장 봄이 온다. 양지바른 밭둑에서 양지꽃, 까치꽃, 제비꽃을 기다리는 것은 가슴 뛰는 설렘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봄 준비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게다. 흑매는 자주색 꽃망울을 몽글몽글 부풀리더니 두어 송이 수줍게 웃는다. 곁의 목련은 솜털 보송보송한 아린으로 우윳빛 꽃을 소중하게 안고 있다. 자연의 오묘한 질서는 어김이 없다.

봄이 온다 하여 노상 같은 봄이 아니듯, 오늘이 내일이 될 수 없으리라. 봄은 사계절의 첫 주자다.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며 새 뜻을 펼친다. 농사일을 서둘러야 하고 신학기를 맞아 풋풋한 새내기들이 첫 걸음을 뗀다. 왁자지껄 어울려 지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싱그럽다. 중학교에 입학하는 내 손녀처럼 인생의 봄 같은 아이들이 사랑스럽다. 지금의 가슴 뛰는 순간을 늘 기억한다면 자신의 시간을 소중히 거두게 될 것이다. 뽀얀 얼굴에 열꽃이 피고 꿈도 벙긋 부풀어 오르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시작이 절반이다. 봄. 완주에 연연하지 않는 첫걸음을 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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