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중의 전통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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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전통 있는 문중, 전통 있는 마을
어도리 진주강씨 문중 명문 이뤄
무과방목 상 최초 급제자 강계남
강여민, 어도산내리 경민장 지내
강봉서, 문과 급제…문중서 처음
강직한 성품…20여 점 고신 남아
제주목 관아는 행정·경제·군사·사법 등 전 분야를 통치했던 제주목사가 머물던 곳이었다. 사진은 지난해 7월 제2회 제주목 관아 과거시험’이 열리는 제주시 제주목 관아 관덕정에서 선비복을 입은 참가자들이 종이에 붓으로 글씨를 쓰며 과거시험을 보고 있는 모습. 제주新보 자료 사진.
제주목 관아는 행정·경제·군사·사법 등 전 분야를 통치했던 제주목사가 머물던 곳이었다. 사진은 지난해 7월 제2회 제주목 관아 과거시험’이 열리는 제주시 제주목 관아 관덕정에서 선비복을 입은 참가자들이 종이에 붓으로 글씨를 쓰며 과거시험을 보고 있는 모습. 제주新보 자료 사진.

과거 급제자를 정리하다 보면 전통 있는 문중이 전통 있는 마을을 만드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제주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부하는 마을이 많다.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도 이런 전통이 보이는 마을 중 하나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전국에 산재한 전통 명문가들이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수집 정리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그 사업의 하나로 제주도의 문중 고문서를 조사한 적이 있다

이때 어도리 진주강씨 문중이 소장하고 있는 문서들도 조사 대상이 됐다. 그 결과 토지매매 문서, 재산 상속 문서, 관직 임명장 등 5백여 점의 문서들이 조사됐다

이들은 어도리에 거주하고 있다고 해서 자신들을 어강(於姜)’이라 부르기도 했다

과거 급제자와 관련해 진주강씨 문중이 편찬한 족보 등에는 다른 급제자들도 보이지만, 급제자 명부인 무과방목에 나타나는 최초의 급제자는 강계남(姜繼男)이다. 강계남은 자가 탁립(卓立)으로 1601(선조 34)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훈련원 봉사를 지냈다. 그런데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에 있는 만력28년경자식년퇴행어신축하문무과방목(萬曆二十八年庚子式年退行於辛丑夏文武科榜目)’에는 본관이 대원(大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두 아들이 무과에 급제했다.

강취황(姜取璜)은 강계남의 장남으로 자가 극진(克振)이다. 1624(인조 2) 증광 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막내 아들이자 강취황의 동생 강치황(姜致璜)도 무과에 급제했다. 그는 자가 여립(汝立)으로 1636(인조 14) 별시 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강계남의 4대손인 강여민(姜汝敏)이 오늘날의 이장인 어도산내리 경민장(警民長)을 지낸 것으로 보아 강여민을 전후해서 어도리로 이주해 온 것으로 보인다.

국조방목(國朝榜目)의 강봉서 문과 급제 기록(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국조방목(國朝榜目)의 강봉서 문과 급제 기록(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무과 급제자만 배출하던 강씨 문중은 드디어 강봉서에 이르러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강봉서(姜鳳瑞, 17461823)는 강계남의 6대손으로 부친은 강시양(姜時揚)이다

그는 애월읍 어도리 출신으로 30세인 1775(영조 51)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홍문관제학 이담(李潭)이 주관한 제주도과(濟州道科)에서 급제한 것이다

강봉서는 1793(정조 17)에 사헌부장령에 임명됐다. 그해 큰 흉년이 든 제주도의 빈민들을 구제하지 못한 관리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타고난 성품이 강직했고, 의견을 올릴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강직함으로 인해 그가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자 당시 나이가 70이 넘었던 아버지 강시양도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자식을 훌륭하게 키웠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국가가 형식적이나마 명예로운 작위를 수여한 것이다

강봉서와 관련해서는 현재 20여 점의 고신(告身)들이 남아 있다. 고신은 일종의 임명장으로서 인사발령이 있을 때마다 수여되는 교지(敎旨)의 일종이다. 사실 제주에서 특정 문중이 이 정도 많은 고신을 보관하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강봉서의 성균관 학유 임명 교지.
강봉서의 성균관 학유 임명 교지.

고신이 많다는 것은 관직을 지낸 사람들이 많거나, 여러 관직을 거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고신들은 대부분 강봉서에게 수여된 것이었다.

사실 문과방목에 기록된 내용만으로는 급제자가 구체적으로 제주도의 어느 지역에 거주했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급한 호적 자료 등을 참고해야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제주대학교 연구팀이 공동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798년에 제주목에서 강봉서에게 발급한 준호구에 어도산내리(於道山內里)에 거주하고 있었음이 기록돼 있다. 어도의 진주강씨 문중은 강봉서와 관련된 각종 문서들을 오늘까지도 보관하고 있어서 집안에 내려오는 전통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이 있어서인지 어도리는 강씨 외에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우선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을 지낸 홍문중(洪文中) 의원을 들 수 있다. 그는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전쟁 및 4·19혁명 등 격동의 혼란기를 보내고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의원직을 박탈당하기도 하는 급전직하의 인생을 살았다

제주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현평효(玄平孝, 1920~2004) 박사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 관서대학 전문부 법률학과에서 수학하였고, 1982년에는 종합대학교로 승격된 제주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했다

군 장성으로는 홍성제 장군이 있다. 홍성제 장군은 홍익대학교 경제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육군 이병에서 출발해 장군(준장)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한 문중의 전통은 타의 모범이 되어 다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간다. 어도리 외에도 전통과 역사가 깊은 마을은 많다

제주의 여러 마을마다 숨어 있어 누군가가 찾아내어 밝은 곳으로 드러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 거리를 찾아내어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본받을 수 있는 전통으로 만들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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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양창진(梁彰珍)은…

▲1967년생

▲제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석사. 박사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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