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명도암의 증손이 제주를 방어하는 무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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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조, 한학·한시 뛰어나
김윤주, 명월진 만호 역임
김율, 조선 중기 제주목사
김은한, 오사카서 항일운동
김은희, ‘꽃반지 끼고’ 가수
김응병, 조선 말 정의현감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명월진성 전경으로 2001년 남문과 성곽, 옹성 등이 복원됐다. 명월진성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성곽이다.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목성(木城)으로 만들었다가 훗날 석성(石城)으로 쌓았다.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명월진성 전경으로 2001년 남문과 성곽, 옹성 등이 복원됐다. 명월진성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성곽이다.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목성(木城)으로 만들었다가 훗날 석성(石城)으로 쌓았다.

김윤조金胤祚생몰년 미상. 자는 진문振門, 호는 영봉瀛峯, 연우재蓮友齋. 애월읍 곽지리에서 태어나 훈장을 하면서 한학에 열중하고 한시를 잘 지었다.

김윤주金胤冑1707(숙종33)~1800(정조24), 무신. 명월진 만호. 본관은 광산. 제주시 봉개동<봉아름>에서 명도암 김진용金晋鎔의 증손, 전적 김계창金繼敞의 손자로 태어났다

1779(정조3) 10월 고익보高益普의 후임으로 명월만호에 부임하고 이듬해 4월 그만두었다. 김계인金繼仁과 김희우金喜雨의 후손이다.  

그는 1727(영조3) 김천정金千錠, 김계경金繼鏡, 부계발夫繼發, 고세련高世連, 원무발元武發, 허지許池, 부찬夫粲, 안후安後, 박완석朴完錫, 고석암高碩巖, 고귀적高貴積, 김후택金後澤, 홍진하洪鎭夏, 강덕웅姜德雄, 현진우玄眞虞, 김국보金國輔, 김창석金昌錫, 부천중夫天重, 김취감金就鑑, 임중수林重樹, 김후완金後完, 허준許准 22명과 함께 무과에 급제했다

김율?~1504(연산군10), 문신. 제주목사. 명환, 본관은 삼척. 김윤신金允信의 아들. 1478(성종9) 문과 친시親試에서 을과에 급제하였다. 1503(연산군9) 8, 남궁찬南宮璨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5041130일 재임 중에 죽었다. 김율 목사는 정사政事에 청렴하여 명환名宦이라 칭하였다

김은환金誾煥1915(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에서 공산당의 항일활동. 본관 김해. 한학자 국은菊隱 김문룡金汶龍의 손자이자, 김근식金近植의 아들이다

산북 조천리<梨洞>에서 태어났고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의 당질이다

일본공산당의 외곽 단체인 전협全協 금속 노조에 가입하고 더구가 가와가미<川上謙一郞>의 권유로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19318월에서 12월 사이에 제주 사람으로서 김서호金瑞鎬(조천), 김태연金泰淵(삼도) 등이 일본공산당에 입당해 전협全協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19325월 이후 오사카거주 한인 입당자가 증가했는데 강근생康根生(종달), 고진호高珍浩(하도), 현호경玄好景(성산), 강주호姜周鎬(상예) 등이 오사카시위원회에 가입, 당세포 및 대중 단체 일원으로 적기와 그 밖의 문서의 살포에 종사했다

일공日共 오사카시위원회 북지구 소속 가두 세포로 활동하던 중 193351일 경시청警視廳에 피검됐다

19339월 하순에 강주호姜周鎬, 11월 하순에 중송학지조重松鶴之助(일본인)를 비롯한 다수의 당원이 검거됨으로써 당 조직은 다시 궤멸상태에 빠졌다

1934년 조직이 재건되면서 오사카시위원회 남구지구 준비회가 결성되자 반제反帝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영복李英福(하도), 김만선金萬善(하도), 김경숙金京淑(하도), 현호진玄好珍(성산), 현상호玄尙好(하도) 등은 시내 동복지구와 남지구 등지에서 나가야도모 노까이<長屋友之會>(셋집살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조직해 집세, 전기, 수도, 가스 요금 등의 인하와 반제투쟁을 벌여 재일 한인의 혁명 의식 앙양에 노력했다.

삐라 살포 등 각종 투쟁에 참가, 1934721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702년(숙종 28) 이형상 제주목사가 명월진성을 순력한 내용(탐라순력도).
1702년(숙종 28) 이형상 제주목사가 명월진성을 순력한 내용(탐라순력도).

김은희金銀姬1949~. 가수, 대정읍장 김준희의 누이, 경주김씨, 대정읍 무릉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보성리에서 성장했다.

배우 고두심高斗心과 함께 제주여고를 졸업, 중앙무대에서 꽃반지 끼고’, ‘사르비아란 노래로 널리 알려졌다

모슬포 제주 제1훈련소 군예대(박시춘, 유호, 황해 전국노래자랑 사회자’(신카나리아, 장혁, 구봉서 등)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후일 전라남도 함평에서 살았다

정헌선생 수갈운(靜軒先生 竪碣韻). 김윤조가 문하생들과 함께 선생을 칭송한 시다.
정헌선생 수갈운(靜軒先生 竪碣韻). 김윤조가 문하생들과 함께 선생을 칭송한 시다.

김응병金膺柄1844(헌종10)~1922(일제강점기), 무신. 정의현감. 조천리 이동파梨洞派 김씨이다. 본관 김해, 김기임金基任의 아들, 자 달총達聰

1880년 무과에 급제, 188612월 김영준金永俊의 후임으로 명월만호에 임명됐다

1894(고종31) 124일 홍재심洪在深의 후임으로 정의현감에 임명, 이듬해 110일에 도임하고 189625일 원에 의해 그만두었다

1894919일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제주목사 이규원李奎遠의 장계를 보니 본주의 전 오위장五衛將 김응병은 의연곡을 원납願納, 관하 수령이 비면 임명함이 어떻습니까?’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또 같은해 127일 내부대신이 상주하기를 정의현감 김응병은 집이 본도에 있으므로 조사朝辭를 면제하여 부임함이 어떻습니까? 하니 임금의 뜻을 받들어 윤허하였습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1895(고종32) 526일 칙령 제98호로,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제주·정의·대정을 군으로 하여 각각 군수를 두어 제주관찰사濟州觀察使에 속하게 했다

그의 후임 수재後任守宰 성준호成俊鎬로부터 정의군수라고 지칭됐다

이때부터 제주를 부(전국 23부 중의 하나)로 하고 목사를 폐지하고 관찰사와 참사관參事官으로 하여금 군수를 겸임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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