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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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철, 사회부장

14세기 동방 무역의 거점이던 이탈리아 제노바는 흑해 연안을 떠돌던 배를 받지 않았다. 이 배들은 터키와 그리스, 지중해의 여러 섬에 흑사병(페스트)을 퍼뜨렸다. 공포에 싸인 제노바는 선박 입항을 거부했다.

이 선박들은 할 수 없이 프랑스 마르세유로 갔다. 1347년 11월 이 도시는 입항을 허락해줬다. 마르세유는 초토화됐다. 이후 흑사병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스칸디나비아와 모스크바까지 번졌다.

흑사병은 유럽을 뒤흔들었고, 14세기 유럽 인구의 4분의 1가량을 몰살시켰다. 7500만명에서 최대 2억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보고됐다.

인도 풍토병이었다가 1817년 콜카타에서 본격 발병한 콜레라도 전 세계를 휩쓸었다. 콜카타에 있던 영국 군인 5000명을 1주일 만에 몰살시켰다. 183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감염자 사망률이 50%를 넘자 공포에 질린 시민들이 도시를 탈출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콜레라는 1820년 중국을 거쳐 조선에 상륙했다. 1822년 콜레라는 제주도를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발생했다. 당시 조선 인구는 1000만명에 육박했지만 콜레라로 100만명이나 줄었다.

1946년 여름 제주에서는 콜레라가 발병했다. 의약품은 바닥을 보였고, 화장실은 비위생적이어서 콜레라에 속수무책이었다. 콜레라 창궐 2개월여 만에 제주에서는 369명이 목숨을 잃었다. 치사율은 65%에 달하면서 도민들은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컸다.

광복이 되자 일본으로 떠났던 도민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제주도 인구는 광복 전해인 1944년 21만9000명에서 1946년 27만6000명으로 2년 새 5만7000명이나 늘었다.

인구는 급증했지만 광복 후 3년간 제주에서는 흉년과 역병, 흉년의 악순환이었다. 제조업체의 가동 중단과 높은 실업률, 미곡 정책의 실패로 제주 경제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1948년 제주4·3사건의 발생 배경에는 66일간의 가뭄으로 대흉년이 찾아온 데다 콜레라가 만연한 것도 한 원인으로 꼽힌다.

2013년 5월 제주에서 ‘야생 진드기’(작은소피참진드기)에 물려 중증 열성혈소판 감소증후군(SFTS)에 감염됐던 70대 환자가 사망, 보건당국은 비상이 걸렸다.

의료계에서는 노인들을 중심으로 혈소판과 백혈구 감소, 구토·설사 등 소화기 증상 등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해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다 이 당시 감염 과정을 역추적한 결과 ‘야생 진드기’가 주범임을 알아냈다.

드넓은 숲과 초지에 마소를 방목해 왔던 도민들은 야생 진드기를 하찮은 미물로 봤지만 이를 매개로 한 질병이 확인되면서 공포의 대상이 됐다.

SFTS로 인해 제주에서는 2013년 4명, 2017년과 2018년에는 각각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 우한 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2015년 전국을 휩쓸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마저 차단한 제주는 전염병 청정 지역이었지만, 코로나19는 4번째 확진자가 나왔다.

코로나19 치사율은 사스나 메르스보다 낮지만 전염력과 전파속도는 10배나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감염병은 일반적으로 잠복기에는 전파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코로나19는 증상이 없을 때도 전파력이 있는, 즉 ‘무증상 감염’이 특징이다.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상 도민이 코로나19를 직접 옮긴 사례는 없다. 확진자 4명은 대구를 방문했다가 감염됐다. 방문지를 따지기 전에 누구나 감염증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긴장의 끈은 놓지 말되 위로와 포용의 마음도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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