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에게 4·3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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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 시인·문화평론가/논설위원

살아남은 자들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저편에 강한 부채 의식을 갖기 마련이다. 선한 이들이 힘을 갖는 세상은 참으로 멀고도 험난하여 숨죽인 채 쉬쉬해야 했고, 나름의 삶을 이어가며 온전하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무력감과 자괴감에 휩싸이고, 살아내려 기억을 왜곡하기도 하고 억압자들의 이데올로기에 포로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제주4·3제70주년범국민위원회’는 서울 유족들을 인터뷰하여 『재경 4·3생존 희생자 및 유족 증언 조사 보고서』를 내놨다. 『4·3진상보고서』의 미진한 분야를 보완해 진상 및 명예 회복의 자료로 활용키 위해 재경제주4·3유족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한 결과다. 지난 6일 책임연구원 양성자 씨, 연구원 한경희 씨를 만나 그간의 활동을 물었다. 열두 분의 유족들을 지속적으로 만나며 수행한 채록 작업이 얼마나 지난한 일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4·3은 그들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70년 동안 유족들은 실상을 모른 채, 또는 숨기면서 살아와야 했다. 여덟 살에 4·3을 겪은 오청자 씨는 20대에 제주를 떠나 수원에 살면서, 오빠가 왜 죽었는지, 아버지는 해방이 되고도 왜 귀국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4·3 때 큰오빠의 사망 충격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께 자기는 자식이 아니냐고 따지고 싶다며, 그저 ‘억울한 죽음’으로만 이해했다. 정수호 씨는 아버지가 4·3에 군경에 의해, 외삼촌은 무장대에 희생되고, 중부는 일제징용의 피해자요, 숙부는 일본에서 북송된 후 행방불명이 되는 등 가족사가 그야말로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모두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1948년 초토화 작전에 의해 군인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총살하는 장면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박부자 씨는 연좌제 피해를 걱정해 50년 동안 부친의 사망신고를 미루다, 정년퇴임 후 형무소 마이크로필름을 일일이 검색해 판결문과 광주형무소 수형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채록 연구원들은 말했다. 고향을 떠난 유족들은 항쟁에 참가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제주에서처럼 유족회를 가입하지도 못한 채 개별화되어 있다.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해 한을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고, 4·3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거나 강연을 들어본 적도 없어서 왜곡된 인식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50주년에는 전단지 한 장 돌리기도 어려웠는데, 다행히 70주년이 지나면서 육지의 유족들은 누에고치처럼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4·3의 원한을 풀어내고, 진상을 온전하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재경제주4·3유족청년회, 4·3범국민위원회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에 제주도민들의 격려는 더없이 필요하다.

양성자 씨는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물으니 이렇게 말한다. “4·3은 이데올로기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제주도민과 외세의 싸움이었습니다. 이때의 외세는 곧 이승만 정권, 미국이라는 거대 권력들이었습니다. 이승만 정권 이후까지 4·3항쟁을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가져가면서 수많은 이들이 실상을 바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주도민들 내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따로 없이 모두가 4·3의 피해자임에 틀림없다. 4·3은 살아남은 자들이 실상을 밝히고, 정명(正名)을 찾을 때까지 끝날 수 없는 기억 투쟁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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