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剪定)이란 ‘넘사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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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농업인·수필가)

전대미문(前代未聞) 코로나 19의 창궐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상춘객(賞春客)들이 실종된 세상은 적막강산이고, 매화를 앞세웠던 봄꽃들도 저만치 혼자서들 피고 진다.

사회적 거리 두기, 이웃사촌들은 물론 가까운 지인들과의 교류마저 눈치가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동호인들을 만나던 파크골프장과 배드민턴경기장까지 폐쇄되고 보니, 집을 나서도 딱히 갈 곳이 없다. 가끔 집 근처 오름들을 오르내리는 날 외에는, 두 달 남짓 집 안에서 자발적 격리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농사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어, 마냥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낼 수 없다.

요즘은 감귤나무 전정의 적기(適期).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내고, 결과지와 예비지들을 취사선택하느라 하루해가 짧다. 작업은 힘들지만, 작설(雀舌)같은 새순이 가지마다 돋아나는 경이로움 마주하고, 모처럼 마스크 없이 들숨 · 날숨 마음껏 쉬며 일하니 살 것 같다.

하지만 전정작업은, 올해도 여전히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었다.

교육받은 전정이론들을 떠올리며 나무 앞에 서 보았지만, 가슴 두근거리고 머릿속 하얘지며 가위 잡은 손 떨려 왔다. 하릴없이 잔가지 몇 개 솎아내곤 후일을 기약하며, 패장(敗將)처럼 물러나왔다. 결국, 사람을 사고, 베테랑 농부인 아내가 일손을 보태 전정을 마칠 수 있었다. 나는 뒷전에서 기술자들의 작업을 선망(羨望)의 눈길로 지켜보며, 군말없이 그들이 잘라낸 가지들을 치우고 정리하는 수밖에.

전정작업이 끝나면, 파쇄가 이어진다. 파쇄작업은, 내가 농부로서의 실존((實存)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잘라낸 가지들을 군데군데 모아서, 잘게 부숴 농장에 골고루 뿌려 주는 일이다.

파쇄기를 구입하고 2년 동안, 소소한 사연들이 많았다. 덩치가 만만치 않아 처음에는 진땀을 흘려야 했다. 창고에서 농장으로 옮기기 위해 차에 싣다가 땅에 떨어뜨리기도 했고, 촘촘한 나무들 사이에서의 전후 이동이 서툴러, 몸이 파쇄기와 나무 사이에 끼어 혼난 적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백락(伯樂)과 천리마(千里馬)처럼, 서로를 인정해 주며 일심동체가 되어 잘 지낸다. 올해는 귀농한 친구들과 동생의 파쇄를 자원해서 도와주느라, 어느 때보다 동분서주해야 했다. 파쇄기도 힘들었겠지만, ‘공인노인(公認老人)’인 내 손목과 어깨도 못지않게 노곤했다. 그래도 남을 돕는 노동의 피로는, 첫사랑보다 달콤하고 가슴이 뿌듯했다.

이제 거름과 비료 시비까지 끝냈으니, 농약살포 시기까지는 당분간 농한기로 접어든다.

빈둥거리며 밀려두었던 책들도 좀 보고, 격조했던 이웃사촌들 · 지인들과 조촐한 식사자리라도 마련해야겠다. 사회적 거리 두기 너무 길어지면, 인정도 멀어질까 걱정된다.

무엇보다도, 내년엔 기필코 전정을 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나가야 하겠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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