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항 과실·감독 소홀이 낳은 비극적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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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탐라순력도와 남영호의 비극
제주 역사·풍속 그린 탐라순력도
이형상 목사 기록…보물 지정돼
대한민국 최대 해난사고, 남영호
서귀포항 위령탑…돈내코 옮겨져

탐라순력도는 197928일 지정된 보물 제652이형상 수고본(李衡祥 手稿本)’ 1015책 중 일부로 300년 전 제주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탐라순력도를 통해 조선시대 서귀포의 모습을 둘러보고 끔찍한 참사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남영호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본다.

탐라순력도로 보는 서귀포시 역사문화 기행

탐라순력도는 이형상(李衡祥) 목사가 1702(숙종 28) 제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제주도를 순력한 지도첩이다. 영천의 이형상 목사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가 제주시에서 매입해 199812월부터 관리하고 있다. 순력(巡歷)은 관찰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회하는 것을 말한다. 제주의 경우 전라도 관찰사가 제주에 내려와 삼읍을 순력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전라도 관찰사는 자신의 임무 중 일부를 제주목사에게 위임했는데, 순력 임무 역시 그중 하나였다.

제주목사 이형상은 17021029일부터 1119일까지 21일 동안 순력을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이형상 목사는 화공 김남길에게 제주도의 역사·풍속·자연 등을 그리도록 했다

화첩에는 순력의 모습을 담은 그림 28, 일상의 행사 관련 11, 제주도 일대의 지도인 한라장촉(漢拏壯囑)’ 1면 등 총 41면의 그림이 수록돼 있다. 그림에 묘사된 같은 시기의 풍물 등은 역사, 민속 등 제주지역 역사연구의 매우 중요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197928일 보물 제652-6호로 지정됐다.

탐라순력도는 지방에서 그려졌지만, 화공의 이름이 남아 있고 그 화필의 수준이 중앙 화원들이 그린 의궤도를 능가하고 있어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형상이 모든 그림의 상단에 제목을 달고 하단에 설명을 첨가했다

다음은 탐라순력도 41폭 중 서귀포역사문화걷는길에 관련된 3개의 화폭에 대한 설명이다

정방탐승(正方探勝)

정방폭포를 탐승(探勝)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폭포 위에 있는 소나무를 강조해서 그린 인상이 짙고, 그 아래 정방연(正方淵)에서 배를 타고 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따르면 정방연(正方淵)은 정의현에서 서쪽 68리에 있고 폭포의 위에는 큰 소나무들이 있고 밑으로 바다가 있어 폭포가 바다에 직접 떨어져 가히 제일명구(第一名區)라고 기록돼 있다.

천연사후(天淵射帿)

천지연폭포에서 활을 쏘는 광경을 그린 그림으로 폭포의 반대편에 과녁을 설치해 화살을 쏘고 있는 모습이다. 폭포의 좌우에 줄을 동여매고 그 줄을 이용해 좌우로 이동하고 있는 추인(芻人·짚이나 풀로 만든 인형)의 모습이 이채롭다

서귀조점(西歸操點)

서귀진의 군사 조련과 군기 및 말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서귀진의 위치와 주변 섬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1970년 서귀항을 떠났던 남영호의 비극

197012월 서귀포항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남영호가 대한민국 해난사고 중 가장 많은 323명의 주검과 함께 컴컴한 바다 속으로 잠겨버렸다. 그리고 2014416일 세월호 비극으로 이어졌다. 남영호와 세월호의 비극은 판박이다.

남영호(南榮號)는 중량 362t, 길이 43m, 7.2m, 시속 15노트, 정원 302명이 승선 가능한 철선이다. 19683월 서귀포~성산포~부산 간 노선을 첫 취항 했고, 매달 10회씩 정기적으로 왕복 운항하던 정기 여객선이었다

남영호는 19701214일 오후 5시경 서귀항에서 승객과 감귤을 싣고 출항한 후 성산항에서 추가로 승객과 화물을 싣고 밤 810분경 부산을 향해 출항했다

이후 남영호가 성산항을 떠난 지 5시간 25분이 지난 새벽 120분경 전라북도 상일도 동남 28마일 해상(쓰시마섬 서쪽 100해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심한 바람이 남영호 우현 선체에 몰아쳐 갑판 위에 쌓아 놓은 감귤 상자가 갑판 좌현 측으로 허물어졌다

순간 중심을 잃은 선체가 좌현으로 넘어지고 선체가 기울면서 중심을 잃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결국 전라남도 여수시 소리도 인근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남영호는 긴급구조신호(SOS)를 타전했지만 해상 부근 어느 무선국에서도 조난 신호를 포착하지 못했다. 당시 남영호는 정원이 302명이었는데, 승객과 선원 등 338명을 태워 정원을 36명이나 초과했다. 이 사고는 운항 과실과 낙후된 선박 시설 및 기관,  무전시설, 그리고 이를 단속해야 할 경찰과 해운 당국의 감독 소홀등으로 인해 발생한 참사였다.

남영호의 희생자 수는 조난수습대책일지에는 326, 부산지방해양심판원 재결문에는 323명으로 기록됐고 위령탑 비문에는 319명으로 새겨져 있다.

사고 당시 서귀항에는 임시대책본부가 설치돼 유족 1000여 명의 통곡 소리로 평화롭던 서귀포 지역은 아수라장이 됐고, 남영호가 떠났던 자리에는 위령탑을 세워 그날의 원혼을 달래었다. 위령탑은 1982년 서귀포항 임항도로 개설로 인해 서귀포시 돈내코 법성사 인근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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