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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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문화인류학적 개념으로 말은 약속이고 책임이다. 약속을 매개하는 게 말이고 말로 했기 때문에 지켜야 하고, 그럼으로써 책임이 따르는 건 당연하다.

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예전 교단에서 학생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사람을 왜 사람이라 했을까, 람사라 하지 않고.’라며 웃었던 적이 있다. 몇 십 만에 이르는 우리말 어휘 앞에 놀란다. 그 많은 어휘가 우리 정신문화의 소산이면서, 한편 그것들이 민족 문화와 정신의 토양이 돼 있다는 사실 앞에 숙연해진다.

이런 쪽에서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자주·애민·실용의 3대 정신은 참으로 숭고하다. 어떻게 봉건 왕정시대에 그런 화통한 생각을 했을까. 더욱이 사대주의에 물들었던 시절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않아’라며 글자를 만들 필요성을 말한 ‘자주정신’엔 전율할 지경이다. 신판 사대주의에 기웃거리는 우리를 통렬하게 꾸짖는다. 글을 쓰면서 그 뜻을 기리고 또 기린다.

국어 선생이었고, 지금 글을 쓰고 있으니 한글의 그 둘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문학을 하면서 자연 우리말에 대한 샘솟는 사랑을 안다미로 받고 싶다. 우리말에 한없이 기우는 사랑의 마음을 어찌하랴. 한때 자기도취에서 한자어를 선호했던 게 현학(衒學) 취향인 걸 뒤늦게 알고 얼마나 가슴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자책했다. 한자어도 국어이니 무조건 배제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순우리말이 그로 말미암아 뒷전으로 밀려나선 결코 안된다 함이다.

순우리말로 글쓰기를 시험해 보곤 하지만 간에 차지 않음을 안타까워한다. 당장 월과 요일 이름 따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도저도 다 제쳐 놓고 한글맞춤법의 맨 끝에 나오는 ‘법’을 어떻게 할 것이며, 사각형을 네모꼴로 학교를 배움터로 한다 치고 심리학을 달리 바꿔 놓을 방도가 없다. 막다른 데 이르러 한 발 물러선 게, 하릴없이 가급적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진 순우리말을 쓰자 하고 있다.

‘시나브로’라는 순우리말을 무척 아낀다. 예전 고등국어 기행문에 들어 있던 구절이 떠오른다. ‘시나브로 날은 저물어 가고….’ 낯설던 이 말에 그 후 몇 년 새 날개가 달리더니 이젠 낯익은 말로 자리매김했다. ‘시나브로’, 몇 번 되풀이해 읽어도 막힘없고 부드러운 유성음의 조합이다. 뜻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그러니까 ‘점차·천천히·사이사이·살금살금’이라, 어떤 일이나 정황이 ‘아주 느리게 진행됨’을 나타낸다.

‘도저히 가망 없어 보이던 방죽 쌓는 일이 시나브로 시나브로 이어져 나가더니 마침내 완성의 날이 온 것이다.’(조정래, 태백산맥). 반복해 쓸 정도다. 작가가 ‘시나브로’를 어지간히 즐겨 쓰는가 보다. 다만 이 말을 ‘’야금야금‘으로 풀이하기도 하나 어감이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물려받은 재산을 시나브로 다 없애 버렸다.‘라 하면 상당히 부정적이지 않은가. ’바람이 불지 않았으나 낙엽이 시나브로 날려 발밑에 쌓이고 있었다.‘처럼 서정적으로 정겹게 쓰면 좋다.

나는 지금 책상 앞에 전 오현고 교장 고영천 선생이 엮은 《순우리말 사전》의 ‘시나브로’를 펼쳐 놓았다. 순우리말을 한데 모아 엮은 회심의 역작이다. 〈권하는 글〉 끝 문장의 여운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우리말에 대한 사랑도 쑥쑥 자라길 소망한다.” 가슴 뭉클하다. 고 교장은 영원한 국어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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