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으로 사라진 다방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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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논설위원

다방(茶房)이라는 용어는 고려시대에 등장한다. 다방은 차를 끓이는 일(茶事)과 술·소채(蔬菜)·과일·약 등의 일을 주관하던 고려의 한 관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이조(吏曹)에 속한 관청으로서 다례(茶禮)로 외국 사신의 접대를 담당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근대식 다방이 들어선 것은 개항 직후로서, 인천에 외국인이 세운 호텔 안에 다방이 있었다. 그 후 1923년 전후로 일본사람이 명동의 ‘후다미(二見)’와 충무로의 ‘금강산’이라는 다방을 개업했다.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1927년 관훈동 입구에 ‘카카듀’라는 다방이 생겼으나 오래가지 못했고, 담소의 공간 역할은 한 곳은 종로2가 ‘멕시코다방’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로, 명동, 소공동, 충무로 등지에 많은 다방이 문을 열어 음악 감상과 함께 전시회, 문학인 행사 등이 열리면서 다방문화가 형성되었다.

한국전쟁기 피난지 부산에서는 ‘밀다원’, ‘금강다방’을 중심으로 이중섭 등 피난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1952년 3월에는 전쟁 중에도 부산 광복동 일대 다방에서 대한미술협회 주최 《3·1절 축하미술전람회》가 개최됐다. 당시에 다방은 화가, 문인, 영화감독, 배우 등 예술가들이 모여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하루 종일 지인과 담소를 나누며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배고픔을 달랬던 아지트이기도 했다.

집에서 숭늉이나 쉰다리를 즐겨 먹던 제주사람들이 기억하는 최초의 다방은 1947년 문을 연 ‘칠성다방’이다. 이후 다방은 점차 실내가 넓어지고 의자에 앉아서도 벽을 잘 볼 수가 있어서 전시공간으로 선호도가 높아졌다. 제주의 문인과 화가들에게 다방은 잊을 수 없는 문화공간이었고, 한때 제주 문화의 확산과 소통에 기여한 추억의 장소였다.

1954년 제주 오아시스다방에서 서양화가 조영호가 최초로 다방전시를 열었다. 그 후 유행처럼 56년에는 김창해가 개인전을, 1957년에는 고영만·김택화 2인전을 열었다. 1955년 7월 남궁다방에서는 서양화가 강태석 개인전이, 8월 서양화가 김수호 개인전이, 9월 구대일 파스텔화전이 연달아 열렸다.

이후 시간차를 두고 그 이름도 정겨운 양지다방, 뉴욕다(양)과점, 무지개다방, 호수다방, 백록다방, 청자다방, 소라다방, 산호다방, 중앙다방, 정다방 등이 생겨났고, 서귀포에도 초원다방, 보물섬다방, 송미다방, 호반다방, 원다방, 동명다방, 동인다방 등이 산남의 전시장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다방문화의 전성시대였다.

다방전시를 끝까지 지킨 곳은 산호다방이다. 칠성통 입구에 있었던 산호다방은 장소가 넓고 입지가 좋아 인기가 높았다. 산호다방은 1970년 8월 서양화가 임직순·양구 2인 소품전을 시작으로 1986년 8월 박무생 유화 개인전까지 약 16년 동안 전시 공간의 기능을 훌륭하게 해냈다.

왜 하필 다방이 문화공간의 주축이 되었을까. 다방전시가 업주에게는 방문자가 많아져 영업 이익이 늘었고, 예술 공간이라는 인식 때문에 장소의 품격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화가는 임대료 없이 관람객을 대면할 수 있어서 경비 절감도 되고, 작품 판매도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최근에는 다방의 수가 줄고 현대식 카페와 브랜드 커피전문점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그 시절 다방전시의 낭만도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의 문인과 화가들도 그리운 사람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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