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공무 수행이 우선이고 사적인 일은 뒤로 미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17세기 조선시대에는 선사후공(先私後公)을 지지하는 견해가 다수였다.
잠시 역사적 사실을 반추해보자. 조선시대 때 관례상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국왕은 모화관으로 행차해 사신을 영접해야 했다. 현종 4년(1663년) 청나라 사신이 한양에 왔을 때 홍문관 수찬 김만균은 친할머니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했기 때문에 할머니 원수인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에 도저히 참여할 수 없다고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김만균이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왕에 대한 수행을 회피하려고 한 사직 상소는 수리되지 않았고, 의금부에 하옥되고 파직됐다.
후에 김만균의 사직소 반려·파직을 두고 조정은 이를 지지 또는 비판하는 세력으로 양분됐는데, 이것이 공의(公義)·사의(私義) 논쟁이다.
서필원 등 선공후사(先公後私)의 공의론자들은 개인사를 일일이 용인하면 조정의 기강이 바로 잡히지 않고 국사를 담당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며, 사정보다는 공무의 수행을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송시열과 그 문인 등 사의론자들은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왕을 수행하는 것보다 비록 사적이기는 하나 조모의 복수에 대한 의리를 지키게 해 주는 것이 인심과 천리를 유지하게 하는 합당한 조치라고 하며, 서필원의 선공후사론을 반박했다.
공직자는 사익보다는 공적인 일을, 자기보다는 주민을 먼저 생각하는 행정을 펼칠 때 선공후사의 청렴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고경택, 제주특별자치교육청 감사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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