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재일교포 단합·교육 위해 애쓴 언론인이자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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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구, 기사환국으로 제주 유배…귀양기간 유생 교육 힘써
 김진근, 제주시 이호동 출신 재일교포로 교육공로상 수상해
 김진석, 고종 25년 대정현감 부임…국권 상실하자 은둔생활
 김진성, 영조 22년 5월 제주판관으로 부임 후 이듬해 파직
 김진옥, 정희량·조정좌 반란 진압…영조 10년 대정현감 재임
올해 1월 열린 재일본관동제주도민협회 신년인사회 모습. 제주시 이호동 출신인 김진근은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재일본관동제주도민협회 회장,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 오사카지방본부 단장, 오사카 교포학교 백두학원 교장 등을 역임하며 재일교포들의 단합과 교육에 기여했다. 사진=제주도청 제공
올해 1월 열린 재일본관동제주도민협회 신년인사회 모습. 제주시 이호동 출신인 김진근은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재일본관동제주도민협회 회장,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 오사카지방본부 단장, 오사카 교포학교 백두학원 교장 등을 역임하며 재일교포들의 단합과 교육에 기여했다. <사진=제주도청 제공>

김진구金鎭龜1651(효종2)~1704(숙종30), 문신, 유배인, 시호 경헌(景獻), 자 수보(守甫), 호 만구와(晩求窩), 본관 광산

영돈년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장남이며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이다.

1689(숙종15)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출을 반대하자 동평군(東平君) 등의 반대파의 무고로 제주에 유배됐다

기사환국으로 제주에 유배됐던 김진구의 비.
기사환국으로 제주에 유배됐던 김진구의 비.

16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관이 되어 현종실록수찬에 참여했다.

이어 정언·헌납·교리·응교·집의 등을 역임했다. 1684년 경상도 감사가 됐고 이어 승지가 됐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의해 남인 정권이 들어서자 김석주(金錫冑)와 함께 가혹한 수법으로 남인을 숙청했다는 탄핵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됐다.

처음 유배소는 주성 안의 가락천(嘉樂川) 냇가 주기(州妓) 오진(吳眞)의 집이었다. 귀양살이 5년 동안 제주의 자제를 가르치고 유생들에게 경사(京師)의 학풍을 지도했다.

특히 이중발(李重發이중무(李重茂) 형제, 정의현 사람 오정빈(吳廷賓고만첨(高萬瞻), 그리고 김덕환(金德煥·감산리·일명 千煥) 등을 열심히 가르쳐 이중발, 오정빈, 고만첨 등 3명은 문과에 급제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풀려나 호조판서에 기용되고, 곧 경기도 관찰사가 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도승지·전라도 관찰사 등을 거쳐서 1696년 강화부유수·세자가례부사(世子嘉禮副使) 등을 역임했다.

이어 형조·공조·호조의 판서를 역임한 뒤 1700년 지돈녕부사·어영대장·수어사 등을 거쳐 이듬해 우참찬·좌참찬, 1702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진근.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진근.

김진근金晋根1918(일제강점기)~1980, 재일본(在日本) 교육자·언론인, 재일본관동제주도민협회 회장, 본관은 광산.

제주시 이호동 오도롱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에서 1941년 간사이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 대학원을 수료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해방 후 오사카에서 공화(共和)신문의 주필 겸 사장을 역임하고 1946103일 창립한 대한민국거류민단 오사카부(大阪府) 지부 단장으로 피선됐다. 오사카부 직속 민단(民團)지부가 30개소나 됐으며 한때 단원수가 87121명이나 됐었다.

196499일 재일교포들이 아시아연구소를 창립했다. 소장은 김진근, 상임 이사는 김용해(金容海·이호)였으며 안재호(安在祜·가시) 등 교포 경제인 18명이 후원회를 조직했다.

1968년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 오사카지방본부 단장, 오사카경제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오사카에 있는 교포학교인 백두학원(白頭學院)의 교장을 거쳤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재일교포로서 교포 교육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교육공로상을 수여한 바 있다.

1974년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조교수로 취임하여 국제관계론을 담당해 가르쳤다.

큰아들 김영교(金永敎·1934~1998)1954년에 제주농고를 졸업, 서울대학 농과대학을 거쳐 일본의 유명한 홋카이도(北海道>)대학 농과대학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려대학 농대 교수로 오래 재직하고 동 대학의 학장을 역임했다.

김진석金振錫1868(고종5)~1927(일제강점기), 대정현감, 후일 개명해 김교석(金敎錫), ‘선생록에는 김석진(金錫振)으로 표기됐으나 이는 잘못이다. 자 낙서(洛瑞), 호 추재(秋齋), 본관은 경주.

경상도 산양 추산의 김학희(金學熙)의 아들이다

1888(고종25) 통훈대부로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동년 8월에 대정현감으로 임명됐다.

1888(고종25) 10, 윤정식(尹正植)의 후임으로 대정현에 도임했고 18902월에 떠났다.

1900(광무 4)에 선원전(璿源殿) 영정을 옮길 때 시위해 가자(加資)됐다.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추롱대(秋聾臺)를 쌓고 벗과 시를 읊으며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김진성金振聲생몰년 미상, 제주판관.

1746(영조22) 5, 김서구(金瑞龜)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479월에 파직됐다.

1747(영조23) “예전부터 마정은 나라의 중대한 일인데, 요즈음의 마정은 한심하다고 보아 제주에서는 목사란 자와, 각 목장의 감목관(監牧官), 겸감목관(兼監牧官) 등이 직분을 거행하지 못하는데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며 그러니 정사는 예전대로 따르는 것을 버려둘 수 없으니, 비국(備局)과 태복시(太僕寺)에서 상의하여 구정의 해이하여진 것을 모두 새롭게 수거(修擧)하고 여러 목장이 있는 곳을 태복에서 벌여 써서 들이라. 그러면 때에 따라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적간(摘奸)하겠다. 모두 그 수의 진위와 그 말의 비척(肥瘠)에 따라 권징(勸懲)할 방도가 있을 것이고, 제주의 공마도 비척에 따라 한 가지로 권장할 것이다라고 분부했다.

김진옥金振玉생몰년 미상, 무신. 대정현감. 1734(영조10) 8월 박세필(朴世弼)의 후임으로 부임하고 17357월에 떠났다.

서울에서 교유할 때 경상도 감사 황준(黃濬)이 그가 인재라는 것을 알고 등용했다.

이때 역적 정희량(鄭希亮조정좌(曺鼎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구영장(大邱營將) 한연(韓璉)이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김진옥은 스스로 대구영장이라고 칭하며 병사 300명을 이끌고 합천 땅에서 적장 조정좌를 죽이고 반란군의 항복을 받았다.

그 후 무과에 합격해 부장(部將)과 오위장(五衛將)을 거쳤다.

그리고 낙안(樂安명천(明川) 등의 부군(府郡) 책임자로 제수됐으나 노모 봉양의 뜻으로 부임을 사양했다.

동림성(東林城)을 축조하고 가선동지중추(嘉善同知中樞)에 승진, 뒤에 황해도 풍천부사(豊川府使)로 재임 중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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