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봉수와 교신하며 적의 동태 감시했던 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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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별도연대와 화북동 비석거리
타원형 석축 형태의 별도연대
2001년 복원…예스러움 덜해
곤을동 향하는 길에 비석거리
제주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
고처량 등 선비 고향 거로마을
제주도기념물 제23-9호인 별도연대의 모습. 화복1동에 있는 별도연대는 적의 동태를 관찰하는 동시에 해안의 경계를 감시하는 연변봉수의 기능을 겸했다. 고증을 거쳐 2001년에 복원됐다.
제주도기념물 제23-9호인 별도연대의 모습. 화복1동에 있는 별도연대는 적의 동태를 관찰하는 동시에 해안의 경계를 감시하는 연변봉수의 기능을 겸했다. 고증을 거쳐 2001년에 복원됐다.

화북포구와 해신사를 둘러보고 난 후 별도연대를 찾아가는 길은 아기자기한 해안마을 골목길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특히 이곳은 제주의 예스러운 골목과 연대, 환해장성을 같이 볼 수 있어 더욱 정겨운 곳이기도 하다.

이번 주는 해안마을 골목길을 넘어 4·3사건으로 사라진 마을인 곤을동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비석거리를 걸어본다.

복원된 별도연대와 환해장성

화북11537번지에 있는 별도연대는 제주도기념물 제23-9호로 지정돼 있다. 돌로 쌓아 올린 연대는 적의 동태를 관찰하는 동시에 해안의 경계를 감시하는 연변봉수의 기능도 겸했다.

연대에는 별장 6, 연군 12명이 배치됐다. 별도연대는 동쪽으로는 원당봉수, 서쪽으로는 사라봉수와 교신했다. 별도연대는 언덕 위쪽을 따라 타원형 석축으로 구조화된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고증을 거쳐 2001년 복원했다는데 복원된 연대와 환해장성은 예스러움보다 현대 맛에 억지로 맞춘 듯하다.

화북포구 답사에는 해안 풍경 감상과 더불어 여러 용천수 물통을 들러보는 재미도 있다. 소먹이 물인 쇠물, 동선창 근처에 있던 큰이물, 화북포구 앞의 금돈지물, 어른물, 큰짓물  등등

꽤 많은 물이 흐르는 고랫물은 별도연대 가는 길목 바닷가에 있었다. 물통 옆에 방앗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또는 고랫물 포구 모양이 화북 앞바다에 나타나기도 하는 고래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전에 소개한 동제원 곁에는 유명한 동주원물이 있었으나 1960년대부터 시작된 일주도로 확장·포장 사업으로 매립됐다.

이곳만이 아니다. 제주도처에서 용출하던 우물들이 산업화로 매몰되고 말았다. 매몰된 우물을 복원하는 것 역시 정체성 복원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화북동 비석거리.
화북동 비석거리. <사진=전광희씨 제공>

화북동 비석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오현학원 교문을 나서는 곳에 동제원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을 읽고 나니 정겨운 골목이 나타난다. 4·3사건으로 사라진 마을인 곤을동으로 가는 길에 나오는 것이 화북동 비석거리다.

제주에는 마을마다 비석거리가 있다. 하지만 화북동 비석거리(화북동 5749번지)는 여느 마을과 달리 제주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됐다.

화북동 비석거리에 있는 비석.
화북동 비석거리에 있는 비석.

이곳에는 꽤 오래된 비석들이 누군가 읽어주길 기다리는 듯 서있다. 몇 개의 비석에는 자연적인 마모가 아닌, 누군가 글자를 쪼갠 흔적도 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의 흔적 속에 제주인들의 존경과 원망이 담겨 있지는 않은지.

선비의 마을 거로가 낳은 유명인들

예부터 유림사회에서는 ‘1거로 2납읍 3광령이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거로에는 많은 선비들이 태어나고 살았다.

그중 김정 목사를 도와 삼천서당을 세우게 한 고처량, 탐라4절로 불리는 양유성, 동반 급제한 삼형제 등 제주역사·문화에 큰 발자취를 남긴 몇 분을 소개한다.

고처량=171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조좌량, 전라도 구례현감을 지낸 고처량은 신임사화로 조정이 불안해지자 귀향했다

1733년 조정의 부름을 받아 봉상판관이 됐고 1734년 경남 진해 현감으로 부임했다. 그해 그의 형 고처형과 조카 고영복이 제주에서 진해로 그를 만나러 가던 도중 청산도에서 조난 당하자 11월 제문을 지어 영령을 위로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처량은 현감의 임기를 마치자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귀향했다

앞에서 소개한 노봉 김정 목사가 세운 삼천서당 탄생 뒤에는 거로 출신인 고처량의 역할도 있었다. 구례현감과 진해현감 그리고 제주향교 교수를 지낸 고처량(1688-1762)1734년 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김정 목사에게 강력히 전했던 것이다.

당시 제주에서 훈학하던 서원은 토관 자제들 중심으로 다녔던 귤림서원이 유일했다. 학문을 익히고자 하는 제주 젊은이들의 바람을 잘 알고 있던 고처량은 이를 김정 목사에 적극 알리고 서당을 세워 훈학을 펼치길 권유했다

1736(영조 12) 제주향교의 교수로 있으면서 문묘를 수리 확장하고, 유림의 청금(靑衿:유생을 이르는 말)록을 처음으로 성안했다.

양유성=거로마을에서 태어난 양유성(梁有成: 1684-1761)은 무과에 급제해 전라도 보성군수를 역임한 바 있다.

제주에서는 오래전부터 탐라사절(耽羅四絶)이란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풍수에 고홍진, 복서점술에 문영후, 의술에 진국태, 풍채에 양유성을 지칭하는 말인 탐라사절은 여러 전설을 낳을 만큼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양유성은 또한 급제선생안 탄생에 대해서도 거론되는 인물이다. 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한 제주도 출신 인사들의 이름을 기록한 인명록인 급제선생안에는 1558년 양연으로부터 1815년 좌인호에 이르기까지 338명의 무과급제자 이름이 연대순으로 기록돼 있다.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돼 삼성사에 보존되고 있는 급제선생안은 무과급제자들인 김여강, 김우천, 김우달, 그리고 양우성의 건의로 1720년 이지발에 의해 처음 작성됐다고 한다.

급제선생안이 무과 급제자를 기록한 반면 용방록은 문과 급제자들을 기록한 인명록이다. 용방록에는 1414년 급제한 고득종부터 1863 급제한 한석윤까지 총 56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동방급제(同榜及第) 3형제=1814년 거로출신 김영집, 김영업, 김영락 3형제의 문과초시 동방급제(同榜及第)1817년 김영집, 김영업 형제의 전시문과 급제로 거로마을의 명성이 전도적으로 더욱 알려지게 됐다.

문과 급제자가 많지 않았던 제주도에서 3형제가 같은 날에 문과에 급제해 이름을 날렸으나, 조정에서는 동방급제를 큰 문제로 삼았다.

과거 급제를 번복할 수도, 과거사상 유례 없는 3형제 동방급제를 공인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3형제 동방급제는 한 집안만 너무 번성한다는 부정적인 표현인 문호태성(門戶太盛)’이라 막내를 발방(拔榜)케 해 낙방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첫째인 영집은 통훈대부 예조정랑, 은계찰방 등의 관직을 거쳤고 둘째인 영업은 사헌부장령과 제주판관을 지냈으나 말제인 영락은 제주향교 빈흥도훈장이 돼 평생 동안 백의종군했다.

이후 거로출신 유생들이 제주향교의 요직을 맡는 예가 많았고 부록마을을 포함한 거로동에 선비가 많아서 선비마을로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삼형제의 동방급제와 어머니 오도승방을 기리는 비가 20005월 우당도서관 입구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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