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방패막이·4·3 학살의 모진 역사를 되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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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별도봉 동굴진지와 곤을동
일본군이 미군 저지 위해
별도봉에 동굴진지 구축
일본 본토 사수 전쟁요새
4·3사건 때 곤을동 전소
사람 없는 마을로 남게돼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의 모습. 1949년 1월 4일과 5일 국방경비대가 나타나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에 있는 모든 집을 불태웠다. 그 후 곤을동은 사람 없는 마을이 돼 현재 터만 남아있다. 사진=전광희씨 제공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의 모습. 1949년 1월 4일과 5일 국방경비대에 의해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마을에 있는 모든 집은 잿더미가 됐다. 이후 곤을동은 사람 없는 마을이 돼 현재 터만 남아있다. <사진=전광희씨 제공>

일본은 고려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제주도에 침입해 해안마을에서 약탈 행위를 일삼았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주섬 도처의 해안과 360여 오름 중 3분의 1의 오름들을 마구 파헤쳐 진지동굴을 구축했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일제 동굴진지 중 하나인 별도봉 동굴진지와 아픈 역사 뒷편으로 사라진 곤을동의 흔적을 따라 걸어본다.

일제가 파헤친 별도봉 일제 동굴진지

제주 전역에 구축한 수많은 동굴진지 중 하나인 별도봉 동굴진지는 일분군이 제주 북부 해안으로 상륙하는 미군을 1차로 저지하고 제주동비행장(진드르비행장)과 제주서비행장(정뜨르비행장으로 현재의 제주국제비행장)을 방어하려 구축했다

별도봉에는 모두 22곳의 진지동굴이 있는데, 전체 길이는 함몰된 3곳을 포함하면 300m 이상으로 추정된다

별도봉 동굴진지는 태평양전쟁 말기 패색이 짙었던 일본군이 제주도를 결사항전의 전진기지로 삼아 일본 본토를 사수하려 했던 군사유적이다. 일본군(58부대)은 산하 주력부대의 총병력을 74000여 명 이상 증강해 제주에서 미군 상륙에 대비했다

일본군은 미군 상륙지점을 제주항, 한림항, 모슬포항으로 예상했다. 별도봉과 사라봉을 해안감시와 제주동서 비행장 방어에 유리한 지형지물로 여긴 일본은, 내륙의 일본군 진지와 연결할 수 있는 최적지의 방어 전진 거점진지로 활용해 이곳에 동굴진지들을 구축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미군에게 밀리기 시작한 일제는 오키나와 함락 후, 일본 본토, 더 정확히는 일본천황제를 지키기 위해 7개의 방어기지를 설정했다. 제주는 이른바 7호작전이라 부르는 7개 방어기지 중 하나로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방패막이가 돼야 했다

해안가의 동굴진지, 비행기 격납고, 폭탄 매립지, 한라산 중턱에 만들어 놓은 군용도로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는 전쟁요새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접한 미군은 일본 전투기를 격추하기 위해 제주 해안에 상당량의 폭탄을 퍼부었다.

2차 세계대전이 더 지속됐다면 제주섬은 타국의 전쟁터로 변해 불바다가 될 뻔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패전 후 그들이 버리고 간 무기들이 ‘4·3’때 다시 사용된 악연(惡緣)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다행히도 미군은 제주도가 아닌 오키나와로 상륙했다. 제주가 옥쇄지역이 돼 오키나와처럼 수십 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일 것이다

요사이 전쟁상흔이 짙게 묻어나는 전쟁유적들이 관광객들의 사진 배경으로도 등장하고 있다. 과거의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다. 이를 알고 사진 배경으로 삼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엄청난 의식의 차이일 것이다

다시 찾은 사라진 마을 곤을동·환해장성

곤을동에 있는 4·3 유적지 조감도.
곤을동에 있는 4·3 유적지 조감도. <사진=전광희씨 제공>

고놀개 마을 또는 고로(古老)촌이라고 불렸던 곤을동은 화북1동 서쪽 바닷가에 있던 마을이다.

별도봉 동쪽 끝자락에 있는 안곤을에는 22가구, 화북천 지류의 가운데 있던 가운데곤을에는 17가구, 밧곤을에는 28가구가 평화롭게 서로 의지하며 살던 해안마을이었다.

그러던 194914일과 5, 난데없이 나타난 군인들에 의해 곤을동 마을 전체가 불에 타 버렸다. 그날 곤을동에 나타난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소대는 주민들을 전부 모이도록 한 다음, 청년 10여 명을 바닷가에서 학살하고, 안고을과 가운데곤을 모두를 불태웠다. 다음날에도 군인들은 인근 화북초등학교에 모였던 주민 일부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연디밑에서 학살하고 밧곤을도 불태웠다.

그 후 곤을동은 사람이 없는 마을이 됐다. 해안마을이면서 폐동된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인 곤을동에는 지금도 집터, 올레, 연자방아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4·3의 처절한 아픔을 전해주고 있다.

항상 물이 고여있는 땅이라 해서 이름 지어진 화북동 곤을마을은 고려 1300년 경에 설촌돼 별도현에 속한 마을이었다. 별도봉의 품에서 그리고 제주 북쪽의 너른 바다의 품에서 반농반어하며 수눌음하며 살던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군작전으로 양민들이 희생되고 온 마을이 전소되는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곤을동 모든 집이 불탔고 24명이 희생됐다

곤을이란 지명에서 곱다, 즉 고운 마을이란 이미지가 떠오른다. 심성이 곱고 아름다운 마을 곤을동 사람들의 애달픔과 비통함이 별도봉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의 울음으로 들려온다.

곤을동이 초행길인 참가자들이 겉으로는 아담하고 고운 마을이지만 슬픈 마을의 흔적을 가슴에 담고 가는 답사였다고 소감을 말할 땐 모두가 더욱 숙연해졌다. 초가집 굴묵연기와 멜 후리는 소리가 들리던 곤을동은 간 데 없고 억울한 망자의 원혼만 구천을 떠돌고 있었다

별도봉 산책로를 오가는 수많은 이들이 가끔은 찾아주니 곤을동은 이제 잊히지 않은 이름이 되고 있다

제주의 옛 동네 모습을 간직한 안곤을에는 다음의 내용이 담긴 ‘4·3 해원 상생 거욱대가 세워져 있다.

“194914일 오후 3~4시경 불시에 들이닥친 군인 토벌대에 의해 가옥이 전소되고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집과 사람은 오간 데 없고 돌담만 남아 이 억울하고 원통한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곤을동 초토화 마을 유적터에 55년이 지난 오늘에야 온 도민들의 마음을 모아 해원상생의 굿판을 벌여 이를 위무하고 이곳에 옛 조상들이 그랬듯이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하며 이 거욱대를 세운다.(2004.4.5.)”

곤을동 환해장성.
곤을동 환해장성. <사진=전광희씨 제공>

곤을동 마을에서 동쪽 바닷가로 흐르는 화북천을 넘어 지척에 있는 환해장성(화북14373번지)을 다시 찾았다

곤을동 환해장성은 바다와 경작지 사이에 높이 3m, 너비 1.8m 정도로 축조돼 있으며, 성 북쪽은 낮은 해안이며 성 안은 높은 경작지이다. 현재 140m의 현무암 성벽이 제주도기념물 제49-1호로 지정된 곤을동 환해장성은 원래의 모습에서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환해장성은 탐라만리장성, 고장성, 해안성담 등으로도 불린다. 1918년 편찬된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처음으로 환해장성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바다로 침범해 오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쌓은 성이다

화북동에는 이곳 외에도 별도연대가 위치한 바닷가에 500m의 길이로 복원된 환해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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