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예요, 미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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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진 동화작가

이 저녁 나긋한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건 어인 일일까? 장마가 소강상태를 보이는 지난 달이었으리라.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산책을 미뤄둘 수는 없는 터라 서둘러 집을 나섰었다.

내 산책코스는 주로 한 시간 이내 코스가 많은 편이다. 장거리 산책코스도 있지만 그날따라 짧은 코스로 방향을 선회했었다. 병문천을 끼고 저류지와 소나무숲이 있는 호젓한 산책로로 오래전부터 2층 단독주택이 넓은 잔디밭과 함께 들어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새벽마다 새롭게 드러나는 선선한 풍광이 나를 산책길로 내모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어머니가 치성을 드렸던 서낭당은 이젠 대형 식당들이 잠식하면서 쓰임을 다한 늙은 팽나무만이 이곳이 서낭당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위태롭게 서 있는 팽나무를 보면서 가슴이 아려오는 건 또 어인 일일까?

만남은 필연이었으리라.

안개비 속에 동녘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산책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이다. 2층 단독주택 옆 포도(鋪道)로 들어섰을 때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리트리버로 보이는 대형 견()과 함께 중년 여인이 승용차로 다가오고 있었다. 워낙에 겁이 많은지라 순간 온몸에 우우우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저 개 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순간 밝은 미소와 함께 중년 여인이 다가오며 인사를 한다.

저예요, 미향이.”

내가 고향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미향이? 누군지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 그래, 잘 살암구나!’ 관심은 타인을 배려하는 최소한의 예의 일진데 누군지도 모르면서 툭 던진 한마디가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동안 나를 싸고도는 외연(外緣) 관계들만 중요시했지 어릴 적 고향 사람들과의 관계는 소원(疏遠)한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 집에 다다라서야 반세기 전에 보았던 미향이를 기억해냈다.

우리 동네 살면서 사근사근하게 늘 오빠 곁에서 지내던 미향이. 내가 던진 정감 없는 한마디에 미향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녀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 따스한 미소로 반가움을 나타냈던 것이리라.

산책길 중년 여인과의 해후는 앞으로의 삶은 주변을 돌아보며 살라 암시한 건 아니었을까? 다시 미향이를 만난다면 근황도 알아보고 살갑게 인사를 건네야겠다. 장마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어 곧 무더위가 시작될 것이다. 초복을 앞둔 한여름 밤 중년 여인 미향이가 나를 어릴 적 추억 속으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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