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휴金泰休:1884(고종21)~1978. 무극대도교 항일활동. 본관 김해.
김행원(金行元)의 아들로 산북 봉개리 ‘봉아름’에서 태어나 1917년 보천교에 입교해 간부로서 활동한 바 있었다.
1936년 7월경 강승태(姜昇泰·46·하예)의 권유로 무극대도교의 신도가 돼 간부로서 포교를 열심히 했다. 그는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김택수金澤銖:1901(광무5)~?. 제주신인회·신간회·조선공산당 항일활동. 광복 후에 민주청년동맹 조직. 제주도위원장. 민전 부의장.
제주시 일도리 ‘제주-성안’에서 태어나 1917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상경해 사립 보성전문학교 1학년을 수료하고 돌아와 주류 판매업에 종사했다.
1920년 사립 명신(明新)학교 교사에 재임했고 1922년에는 제주청년수양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사립 명신학교의 경영 지원에 힘썼다. 또 본도 최초의 신진 청소년 항일 단체인 ‘반역자 구락부’의 창립멤버로 활동했다.
1923년 6월 민립(民立)대학 설립기성회 제주지부 창립총회에서 집행 위원으로, 또 제주청년수양회 간사로 선출됐다.
1924년 3월 11일 사상 단체 신인회(新人會)가 탄생되면서 한상호(韓相鎬), 홍순일(洪淳日)과 함께 총무부 간사로 활동 중 검거돼 송종현과 같이 6개월 형을 선고받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전남(全南)해방운동자동맹 집행위원이 되었고 1927년 7월 송종현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제주도 야체이카에 배속됐다. 동년 전남청년연맹 제3회 정기총회에서 의장에 뽑혔다.
또 신간회(新幹會) 제주지회에 가입,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사건에 연루돼 경기도경찰부에 의해 1929년 8월 24일 검거됐다. 1930년 12월 22일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2년 2월 7일 출소했다.
이때 제주 출신으로 유죄를 받은 항일 인사로는 김택수 이외로 송종현(宋鍾炫) 3년 형, 한상호(韓相鎬), 윤석원(尹錫沅), 김정로(金正魯), 강창보(姜昌輔) 등도 각기 2년형을 받았다.
조국이 해방되고 1946년 2월 민주청년동맹을 조직, 제주도위원장이 됐다. 1947년 1월 25일 읍·면 단위로는 맨 먼저 조천면 민주청년동맹이 결성되고 모(某) 대의원 긴급동의로 김택수(金澤銖) 등 5명이 명예 의장으로 추대했다.
이어 동년 2월 9일 서귀면 민청이, 또 2월 10일 대정면 민청 등 각읍면 조직이 완료하게 될 때마다 김택수는 명예 의장으로 추대되고 이어 각 동리마다 조직이 착수됐다. 동년 2월 23일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지부를 결성, 부의장단 4명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1947년 3·1 시위 사건으로 미군정에 의해 남로당원 12명이 체포될 때 4월 중순경 수도경찰청 수사국에 피검(被檢)돼 미군 C.I.C의 조사까지 받고 구속 5일 만에 석방됐다.
해방 정국의 혼란을 틈타 피신 차 일본으로 건너간 후 1955년 조총련 오사카부 본부 상임 의장단으로 뽑혔다. 그 후 북쪽으로 들어갔다가 남로당 계열이 숙청될 때 물러난 후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김평원金平遠:1915(일제강점기)~?. 조천소비조합 항일활동. 광복 후 민청 관여. 본관 김해.
조천리 한학자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의 손자이자 1919년 조천 독립만세 운동의 핵심 인물인 김필원(金弼遠)의 아우, 시인 김지원(金志遠)의 종제이다. 조천리에서 김항각(金恒恪)의 4남으로 태어났다. 조천 만세 운동을 주도한 김시범(金時範)은 그의 장인이어서 김평원은 성장기부터 일제에 저항할 환경에서 자랐다.
중형 김중원(金重遠)의 영향을 받아 1932년 4·5월경 동지 김순재(金淳在)를 시켜 조천 마을 길가에 소년 소녀들을 모아 “조선이 일본에 합쳐진지 22년, 일본 때문에 압박과 착취 속에 자유도 없고 부모 형제들도 일본 오사카 노동시장으로, 혹은 압록강을 건너 유랑생활을 떠난다”라고 역설했다.
또 며칠 지나서 이만구(李萬九) 외 1명과 함께 조천공보(朝天公普) 생도 김호실(金鎬實·16) 외 소년·소녀 15~16명을 모아 같은 내용을 이야기 하자 일제는 구속했다.
김평원, 김순재, 이만구, 김주완 등 4명은 1932년 7월 20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김평원 혼자 항소했지만 1932년 9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대로 선고받
았다.
또 그는 1937년부터 김시용(金時容), 안세훈(安世勳), 김유환(金瑬煥), 현사선(玄巳善) 등과 함께 조천 소비조합운동을 통해 반일(反日)·반전(反戰) 사상을 계몽,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이 부당함을 역설했다.
1938년 2월 지원병 제도 반대 발언으로 치안을 방해했다고 해서 1942년 8월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를 소위 신좌소비조합사건이라고 하는데 그는 잡화상을 하면서 신좌소비조합 상무이사를 역임했었다.
이 신좌(新左·조천)소비조합 항일활동은 조천 경찰관주재소의 고등계 형사 김문용(신창 출신)이 부풀려 취급해 크게 곤욕을 당했다.
해방이 되고 그는 1947년 1월 25일 조천 ‘민청(民靑)’이 결성될 때 의장단에 선출됐다. 이해 3·1절 발포사건 항의시위에 연루된 관계로 동년 4월 3일 미(美) 군정청 포고령 제2호 및 군정법령 제19호 4조 및 형법 제55조 위반으로 미 군정재판을 받았다.
▲김평진金坪珍:1926(일제강점기)~2007. 재일교포 사업가. 제주여자학원(濟州女子學園) 이사장. 재일본제주개발협회 창립 후 회장 역임. 본관 김해, 호 동천(東泉).
제주신문의 회장직과 제주여자학원의 이사장을 맡아 언론(言論)창달과 교육(敎育)진흥에 이바지한 재일실업인 김평진은 제주시 회천동 ‘도래-물’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에 일본 동경에 건너가 20세에 영세(零細)한 행상으로 있었다. 일용잡화를 걸머지고 다니다 자전거가 생기고 리어카가 생기는 등 사업이 번창하자 자신이 생겼다.
김평진은 김해상사(金海商社)㈜의 회장으로서 1963년 제주도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관광(觀光)호텔을 열었다. 제주관광호텔의 등장은 관광산업의 첫 출발이었으며 몇 년 뒤에는 다시 서귀관광호텔을 신축·개관하는 등 관광개발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1968년 그는 제주여자학원(濟州女子學園)을 인수해 현 위치로 신축 이전했다. 다시 제주신문에 투자해 회장이 됐다.
재일본제주개발협회 창립 후 회장·고문을 맡았고 재일한국인상공회연합회 회장직뿐만 아니라 민단(民團)중앙본부 및 동경지부 고문(顧問)으로 참여, 동경한일(東京韓日)친선협회연합회 부회장, 재일대한체육회 고문 등을 맡아 온 재일동포 사회의 큰 별이다. 또 파크사이드호텔 운영에 성공해 회장이 됐다.
김평진은 1961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은데 이어 1982년에는 다시 국민훈장 모란장(牧丹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