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 익어간다
장이 익어간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이향숙 수필가

장 거르기를 했다. 정월에 담근 메주를 두어 달 만에 떠서 으깨고 검게 변한 소금물을 따라냈다. 유리 용기에 들어있던 간장은 한 달이 더 지나는 동안, 잘 익은 까마중 열매 빛을 띠는 게 느낌이 좋다. 손가락으로 맛을 보니 제법 감치는 맛이 오래도록 입안에서 맴돈다.

예전에 된장과 고추장을 적잖이 만들었다가 실패한 일이 있다. 친한 이웃들과 한 날에 담가 해가 잘 드는 거실 밖 창가에 두었다. 깨끗한 옥양목을 씌워 오지항아리의 입술을 끈으로 묶고 유리 뚜껑을 사다가 덮었다. ‘햇볕과 비는 저절로 가려질 것이며 바람은 거름망으로 둘러싸인 유리 덮개가 알아서 들여 줄 것이라는 믿음이 컸기 때문이다. 장독대로 사용하는 창가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도 여름이 다 가도록 장항아리를 들여다보지 못했다. 된장과 고추장은 스스로 잘 발효되고 있을 터였다.

언제부터인가 자동차에서 내리려면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러려니, 좀 쉬면 괜찮아질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동안 한 번도 건강검진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덜컥 겁이 났다.

바람이 가을빛으로 물들어가기 안성맞춤으로 불던 날, 된장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았다. 아예 골마지는 앉아본 흔적도 없고 가뭄에 논 갈라지듯 바짝 말라 있는 게 아닌가. 고추장도 마찬가지였다. 수분과 염분을 제한해야 하는 그 무렵의 나처럼 장항아리 안에서도 수분과 염분의 균형이 깨어진지 오래였다.

젊다는 것만 믿고 깃털처럼 날아다니느라 나를 돌아보지 못한 탓이다. 몸이 힘들어지면서 집안 기제사를 잘 챙기지 못하는 일도 늘 걸리는 일이었다. 큰집 제삿날이면 사촌형님이 항상 정갈하게 음식을 장만하고 차례 준비로 분주했다. 형님이 편하게 대해주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그런 날 더 목이 말랐다.

닭이 물을 먹듯 쉴 새 없이 형님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종일 얼음조각으로 목만 축이는 나의 형편을 알아차릴 겨를이 없는 형님의 눈치를 보느라, 부엌 한구석에서 마음만 쪼그라져 갔다.

감꽃 냄새도 들이고 여름 더위에 그늘 맛도 보이고. 장항아리를 감나무 아래로 옮겨 놓을 걸 그랬나. 매미소리조차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어 장맛을 그르쳤나 싶기도 했다.

시행착오를 겪고 나면 장 담그는데도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다. 질척해진 된장에 삶은 콩과 소금으로 다시 갈무리하면 오래도록 씨된장 역할을 해낸다. 고추씨를 찧어 넣기도 하고, 다시마 가루를 넣어 조미 간장으로 나물을 무쳐내기도 하고. 볶음 고추장만 하더라도 칼칼함에 곰삭은 맛까지 더해져서 한 번 맛을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특히 잘 익은 간장으로 담근 들깨이삭 장아찌를 꼬투리부터 훑어먹는 맛이란. 기운 없는 이의 입맛을 살려주는 데 그만이다.

어쩌다 장항아리 속에 파리가 들거나, 빗물이 튀면 가시가 일기도 한다. 번데기가 보이는 된장은 그 맛도 특별하다. 올해 담근 된장은 두루두루 품었다가 주변까지 적셔주며 곰삭아가기를 바라지만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메마르지 않고 질척거리지도 않으면서 더불어 잘 익어가는 일이 지난 날 내 허물들로 이미 그르쳐 버린 건 아닌지. 늦은 감이 있지만 나로 인하여 아팠을 이들의 마음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싱거워도 간도 못 맞추던 내 몸, 이제는 장항아리가 되어 그들에게 내어줄 차례다.

이 여름, 장이 익어간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강수정 2020-07-24 14:02:43
공감되는 글이네요,, 이 여름 장이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