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막지(無知莫知)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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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청테이프로 다리 꽁꽁 묶인 고양이가 쓰레기 속에서 발견됐다. 생후 3개월쯤 된 새끼 고양이, 앞·뒷다리가 청테이프로 둘둘 감긴 채 낑낑거리고 있었다는 것. 지나던 동물보건사가 신음을 듣고 동물병원으로 데리고 갔단다. 테이프가 강력해 다리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한다. 그냥 지나쳤으면 아주 잘못 될 뻔했잖은가.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지능화한 포식자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은 없지만, 장비를 동원해 동물들을 지배한다. 또 습관적으로 필요 이상 살상한다. 동물의 숫자가 줄어들어 심하면 멸종되는 수도 있다. 특정 동물이 멸종 위기에 처하면 사냥을 일삼다 변덕스레 호들갑을 떤다. “살려내야 한다.” 시치미 딱 떼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복원사업을 펼친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얼굴이다.

청테이프로 다리를 묶고 냅다 버린 고양이는 길고양이가 아니다. 분명 반려묘(伴侶猫)일 테다. 사정이야 어쨌건 매우 잘못됐다. 버린 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반려’의 뜻을 아는가?”라고. 진정 반려의 뜻을 안다면, 차마 기르던 고양이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버릴 수는 없었다.

반려동물이라 부를 때는 개나 고양이가 아닌, 반려견·반려묘다. 사람처럼 이름을 갖는다. 정서적으로 의지하려고 가까이 두고 기르는 애완동물하고는 다르다. 말 그대로 ‘짝이 되는 동물’이라 ‘반려’다.

상세히 말하게 된다. 애완과 반려는 표현상 가까이 기른다는 점에서는 맥락을 같이하나 다른 말이다. 반려는 뜻이 한층 깊다. 평생을 함께 누린다는 의미다. 동등한 지위일 때 가능한 관계다. 단적으로 진정한 반려자는 부부다. 반려동물이란 말은 동등한 반려 관계처럼 대우해 줘야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절친이나 선후배 간을 반려라곤 하지 않는다. 반려동물이라 하면서 애완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 동물은 말을 못한다.

명절 때나 휴가철에 반려동물들은 일대 수난을 겪는다. 때마침 싫증을 느끼던 참에 버려지는 건지도 모른다. 비닐봉지에 담겨 음식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신음한다. 반려라 할 때는 어떤 마음이고 무지막지하게 버릴 때는 어떤 얼굴을 할까. 아무래도 애완동물에 머물러서 좋은 것이지, 반려동물이란 말은 알맞게 쓰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나도 개와 고양이를 기른 적이 있었다. 인연이 아닌지 정을 줬지만 떠나갔다. 한데도 버려진 그들을 보면 갈등을 느낀다. 쓰레기를 헤집는 고양이를 못 본 척 지나친다. 삶을 구성하는 이율배반의 하나로, 양심과 이해타산이 부딪는 순간이다. 사랑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은 건 아닌지. 짐승은 짐승으로 차가운 대상의 세계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설픈 사랑은 상대에게 고통이다. 섣불리 거둘 게 못된다.

한국인이 반려동물을 죽을 때까지 키우는 비율은 12%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다. 88%는 유기되거나 재분양한다는 것. 열의 아홉은 곁에서 떠난다는 얘기가 된다. 반려를 아무렇게나 버릴 수 있나. 얼마나 무지막지 우악스러운 행위인가. 그럴 거면 애초 키우지 말았어야 하지 않나.

반려동물은 아직도 부유층의 징표 같은 그런 관념이 있다. 행여 기르다 무지막지하게 버리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무지막지란 글자 뜻을 새겨 보면, 더할 수 없이 업신여긴다는 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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