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事必歸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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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찬, 수필가

커피잔을 들고 소파에 앉으면 으레 방문과 상방의 천장 사이에 걸어놓은 액자를 습관적으로 쳐다본다. 볼품없이 초라하고 색 바랜 액자지만, 어느새 정이 들었다. 한자로 휘호한 사자성어 事必歸正’. 묵직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와의 인연이 어느새 30년이 훌쩍 지나간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함부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를 갓 지나 세상 이치를 깨닫기보단 아직 혈기가 식지 않은 젊은 시절에 마을 이장직을 수행했다. 어느 날 평소 나를 아껴주시는 마을 유지 어르신 댁에 유명한 서예가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찾아갔다. 어르신이 인사를 시키는데 잘 다듬어진 하얀 수염이 가슴에 닿을 듯 길게 늘여진 채 신선처럼 앉아있는 모습을 대하면서 첫눈에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분이란 아우라를 느낄 수가 있었다

국선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가 귀향하는 길, 쉽지 않은 기회에 공항에서부터 정성스레 모셔왔다고 귀띔해 준다. 유지 어르신과의 친분으로 같이 술도 마시고 담소를 나누면서 글을 써서 주고받는 사이라고 한다. 글씨를 쓰는 분들은 소암 선생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선물 하나 달라고 유지 어르신이 부탁하자 쾌히 승낙하면서 평소 생각하는 글귀가 있냐고 묻는다. 얼떨결에 사필귀정이라 했더니, 선생은 자신도 제일 좋아하는 문구라면서 호탕하게 웃는다.

한옥 널찍한 마루 한가운데 한지가 펼쳐져 있었고 곁에는 듬직한 벼루에 정성으로 갈아놓은 먹물과 붓 두 자루가 놓여있었다.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했는지 당시에는 구경조차 힘든 양주 한 병이 비어있었다. 게다가 새 병마개가 따 있는데 선생의 얼굴은 이미 불콰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붓을 잡을 수 있을까 의아했는데, 선생이 큰 붓을 꽉 힘주어 잡는다. 먹물 한번 묻히고는 하얀 한지 위로 어이쿠하며 쓰러지는데 틀렸다 하는 생각과 꼭 필요한 곳에 점 하나 찍는 게 동시에 일어났다. 기인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당시 쇼맨십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사필귀정언제부터 내 가슴속에 똬리를 틀었을까. 성장하면서 놀부가 잘살고 흥부가 못 사는 세상을 접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심중에 녹아든 것 같다. 이해타산이 없는 일이면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나갔더라면 편안할 수도 있었는데, 괜히 바른말 한답시고 사건의 중심에서 고군분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힘 있는 쪽이 편한 줄 알면서도 힘없는 약자 편을 거들다 언걸 겪은 이력을 돌아보면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사필귀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다

불의는 결코 정의를 이길 수 없다고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옳은 이치를 찾아오는 인간사, 과연 얼마나 될까. 침묵과 관망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행동하지 않으면 놀부의 심보는 더욱더 굳어져 그 안에 갇힌 사필귀정은 언제 찾아올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제주보가 본래 제호인 제주일보를 찾았다. 당연한 결과지만, 행동하는 자의 고통이 쟁취한 산물이란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말할 수 없는 악전고투의 날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익히 안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부단히 내 목소리로 외칠 때, 사필귀정도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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