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고향 위해 전기·수도 공사에 기부…제주도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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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근, 제주상의 1호 명예회원
김홍삼, 전남교육 거목 인정 받아
김홍석, 제주도제실시추진위원장
김화숙, 재일교포 송덕비 등재
김후배, 추자도 어업횡포 항일
김흥수, 제주도에 대작 등 기증
제83회 전국체육대회가 2002년 11월 9일 제주종합운동장에서 화려한 개막식을 갖고 7일간의 열전을 펼쳤다. ‘푸른 꿈, 힘찬 기상, 한라에서 세계로’라는
구호 아래 진행된 제주체전에 김홍근 단장이 이끄는 재일동포선수단이 참여했다. 사진은 당시 개막식 모습(e영상역사관 국가기록사진), 오른쪽 위는 제주
에 들어오고 있는 재일동포선수단(제주일보 자료사진).

김 홍 근 金洪根1932(일제강점기)~2011, 재일교포, 거류민단 가나가와현 단장, 본관 김해, 우후(虞侯)공파로 한경면 저지리 닥모루에서 김태유(金太有)와 여산(礪山) 송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0년 일본 척식(拓植)대학을 졸업, 제주도상공회의소 명예회원 1호로 고향을 위해 전기·수도 공사에 기부한 일로 2000년 정부로부터 주는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2004년 제주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고남부(高南富) 사무국장이 일본을 방문해 모은 당시의 7000만원을 처음으로 기부했다.

가나가와(加奈川)한국상공회의소 부회장, 거류민단 가나가와현 단장, ()가나가와한국종합교육원 이사장, 가나가와현은 인구가 850만명, 37개의 자치제의 지방의회에서 그들의 요구가 100% 채택되니 큰 쾌거였다. 한국인회관 건립에 그는 실행위원장으로서 7억엔 남짓의 자금을 조달해 7층 건물의 훌륭한 회관을 준공했다. 한국은 6·25동란으로 북한의 기습공격에 의해 부산 앞 바다까지 물러났으나 인천 상륙이 역전됐다. 당시 미군이 중국, 북한과의 싸움으로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도 한국 방위를 위해 희생한 사실을 그는 후손에게 알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홍 삼 金洪三1905(광무9)~1986, 교육자. 기독교 장로. 일명 김창현(金昌鉉). 호는 남촌(南村) 혹은 경당(絅堂). 본관은 광산이며 김항석(金恒錫)의 장남으로 성산면 난산리 -에서 태어났다. 성읍리의 정의보통학교에 들어가 1920년에 졸업, 1922년에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1922년 전남교원 양성소를 수료했다. 처음에 전남 동복보통학교 교사로 출발, 1926년 광주제일보통학교 교사로 옮겼다.

19303개월간 일본 나라(奈良)고등사범학교에 교육연구원으로 파견되어 연구과정을 수료했다.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광주교대 학장을 역임한 이창업(李昌業·용담)의 매형으로 두 사람은 전남교육의 거목으로 인정받았다.

아들 김영철(金永轍)은 철학박사로서 한국신학대학 교수 및 학장 서리까지 역임한 학자이다.

1938년 북평교 교장으로 승진, 전남 지역에서 초등교육에 다년간 역임하고 특히 광주 서석초등학교에서 교장을 거치면서 아동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45년 동안 교육계에 종사하고 전남교육위원회의 교육위원으로 활약, 또 동 위원회의 의장을 1952년부터 1957년까지 3선에 걸쳐 역임했다.

한때 실업계에 투신 광주제견(製絹)공장 지배인이 되고 조선잠사회 전남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편 전남대학교 창립재단 관선 이사로 지방대학 발전과 전남 교육에 헌신해 소성(素星)훈장을 받았다. 1970년 정년퇴임 한 후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도회의 장로로 정립되어 신앙생활에 귀의했다. 만년에는 서울로 옮겨 살았다.

김홍석金洪錫1871(고종8)~1946(미군정기), 한말의 한학자. 일제강점기 계몽운동가. 해방 직후 제주도제(濟州道制)실시추진위원장. 초명은 김기련(金沂鍊), 자 공범(公範), 호 시강 혹은 농산(農山). 본관 경주, 제주 성내에서 김재요(金在堯)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말 유배인 박영효(朴泳孝)와 교유하면서 새로운 개화사상에 눈을 돌렸다. 평생 모범 농촌운동과 신생활 운동을 주창, 또 민족계몽 운동과 도민 실력양성에 앞장섰다.

19092월 학부에서 제주공립보통학교의 학무위원을 위촉할 때 그는 김응빈(金膺斌), 이양우(李陽雨), 양달휴(梁達休), 채수칠(蔡洙七), 장제실(張濟實), 김방혁(金方赫) 7명과 함께 활동했는데 이들은 당시 본도의 유력한 인사들이었다.

개화사상에 힘입어 아들 김태민(金泰玟)1913년 경성의전(京城醫專)을 마치고, 일본의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며느리 고수선(高守善) 역시 본도 여의사 제1호이며 여성 지도자였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제주도를 도제(道制)로 승격시키자는 여론이 비등할 때 그를 본도의 최고 원로로 보아 제주도제 실시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에 동분서주하면서 미() 군정청과 요로에 절충해 194681일 숙원이던 도제가 실시되고 본도는 2() 1() 12()의 행정구역과 3() 12()의 행정 직제로 출발됐다. 이런 기쁜 소식을 병중에서 듣고 곧 죽으니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김화숙金和淑1921-, 교포사업가, 광재원(光霽院) 원지(院址)란 표지석을 세웠다. 본관 김해, 좌정승공파 22세손 예방(禮邦)공계 애월김칩, 애월읍 애월리 애월포에서 김창석(金昌錫)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애월교 4년을 거쳐 모교가 6년제로 승격되자 다시 1937년 제12회로 졸업, 일본 아이치겡(愛知縣) 현립 서미(西尾)실업학교 졸, 1943년 애월교의 촉탁(囑託) 교원으로 발령, 애월공립청년훈련소 지도원 겸임했다. 재일교포로서 부친이 한때 살았던 곳인 원동(院洞)을 기념하기 위해 서부 관광도로 길가에 광재원(光霽院) 원지(院址)란 표지석을 세웠다.

1960년대 말경 향리의 전기가설 사업을 할 때에 일금 50만원을 희사해 주어 재일교포 송덕비에 등재됐다.

김후배金厚培1898(광무2)~1934(일제강점기), 추자도 어업조합의 횡포에 따른 항일 활동. 본관 김해, 김현용(金顯庸)의 아들로 추자도 묵리 무기에서 태어났다.

1926년 조합장 김상진(金相鎭)과 이사 황석희(黃錫熙)는 평소 일제 당국과 결탁해 별별 횡포를 일삼고 있었다. 이에 저항해 1926720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판결을 받았다. 김후배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김흥수金興洙1919(일제강점기)~2014, 화가, 저지리 닥모루현대미술관 김흥수관(金興洙館)을 마련, 예술원(藝術院) 회원, 기증품을 상설 전시, 함흥에서 군수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나 중학교 2년 때 조선일

보사 주최 한국중학교 학생전람회에서 1등을 했고, 1936년 함흥고보(咸興高普)시절 제16회 조선미전(朝鮮美展)에서 입선했다.

말년에 한경면 저지리 문화예술의 마을에서 작품 활동을 한 바 있다. 더구나 2006500호 크기의 대작(大作) ‘사랑을 온 세상에를 포함해 작품 20여 점을 북제주군(군수 신철주)에 기증하니 저지리 현대미술관 김흥수관을 마련, 기증품을 상설전시하고 있다.

그는 누드와 추상화를 대비하는 등 이질적 요소를 조화롭게 구성하는 하모니즘화풍을 창시한 한국화단의 거목이다.

그는 1944년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해 7년 동안 프랑스 파리의 아카데미 라 크랑크 샤브마에르에서 회화를 공부, 야수파, 입체파, 표현파 등을 섭렵했다. 1977년 김 화백은 오랜 실험 끝에 하모니즘 화풍을 창시했다. 91세 때인 2010년 예술원 회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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